지난해 말부터 세계를 뒤엎은 코로나19의 팬데믹이 잡힐 기미가 아직 없다. 두 번째 겨울이다. 정부의 조치도 사실상 3단계에서 5단계로 조정됐다. 4월에는 전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됐고 추석을 앞둔 9월에도 2차 지원금이 선별 지원되었다. 경기도도 선제적인 대응으로 도민의 삶을 살폈다. 1ㆍ2차 지원금이 충분할 리 없다. 그럼에도, 꽉 막힌 숨통에 바늘 역할을 했다.
전통사회에서도 이런 어려움에 국가적인 도움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진휼’이라는 단어로 익숙하다. 고려시대에는 임시관청인 구제도감, 진제도감(賑濟都監) 또는 진제색(賑濟色)을 설치했다. 1048년(문종 2) 가뭄에 따른 기근으로 경기지역을 진제했고, 1348년(충목왕 4)에도 관리를 파견해 양광도를 진제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진제소(賑濟所)와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창고를 열고 곡식을 옮겨 도랑과 골짜기에서 백성들이 죽지 않게 했다. 그해 지방 관리의 성적은 사람을 살린 수효로 기준을 삼았다. 1432년(세종 5) 임강현감(경기도 장단) 이명의(李明義)는 진제미두(賑濟米豆)를 줄여 백성들이 굶주려 죽게 한 죄로 곤장형을 받았다.
1409년(태종 9)에는 경기의 굶주린 백성 3천450명을 진제했고, 1415년부터 1417년간의 기근에 경기진제사(京畿賑濟使)를 파견해 대대적인 구휼사업을 전개했다. 그런데 긴급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사세(事勢)를 상세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몇 사례를 살피면, 1419년(세종 1) 전국적인 기근상황에 경기우도의 기민(飢民)은 1만1천124명, 경기좌도는 5천661명으로 조사됐다. 우도에는 진제미두와 잡곡 936석과 장(醬) 215석, 좌도에는 진제미두와 잡곡 378석과 장 101석이 지급됐다. 진제미두는 빌려주고 나중에 환상(還上)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지켜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진제민(賑濟民)에 대한 배려에 더욱 정성을 다했다. 1445년(세종 27) 국왕은 권준(權)을 경기도 진제경차관으로 보내며 업무 매뉴얼을 내렸다. 나이 많거나 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수령이 직접 챙길 것, 여러 날 굶어 지쳐서 쓰러진 기민에게 좁쌀죽을 먹이면 즉사하니 먼저 흰 죽물을 식혀 서서히 삼켜 주린 배를 축이게 할 것, 자기 고을에서 멀리 살아 제때에 진휼미를 받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가까운 고을에서 우선 진제받게 할 것 등이었다. 팬데믹이 빨리 종식돼야 한다. 더 이상의 재난지원금도 반갑지 않지만, 이 때문에 힘든 많은 이들에게 진제는 절실하다. 최선의 방법은 코로나 19 이전으로의 회귀이다. 여기저기서 백신 개발 소식이 들려온다. 뉴노멀은 반갑지 않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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