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저녁 6시, KBS Classic FM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는 시그널 음악과 함께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멘트가 나온다. 강렬했던 한낮의 태양이 하루의 임무를 완수하고 서서히 퇴장할 무렵, 마치 노고를 치하하듯 평화롭고 나지막한 MC의 목소리가 더해지면 우리는 또 다른 내면으로의 여행을 시작하곤 했다. 같은 멘트지만 지금은 다르다. 최근 1년간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평범한 이 말은 당연한 것들에 대한 거대한 안부가 됐다. 얼굴 한번 제대로 마주하기 어려운 전염병의 시절, 이 말은 생략을 품은 깊은 말이 됐다. 유난히 눈이 많은 이번 겨울, ‘조용히 눈이 내렸다’라는 단순한 문장에서 우리는 유년의 시놉시스를, 회한의 화양연화를 떠올린다. 누군가는 가만히 눈 쌓이는 소리에서 흐느낌 소리를 듣는다. 겨울의 감수성에다 특히 지금을 사는 삶의 맥락과 만나게 되면 단 하나의 단어, 단 한 문장이라도 깊고 깊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했고 너무 크게 말했고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너무 많이 먹었고 너무 많은 옷을 샀고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예술의 본질은 생략이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생략을 통해 메시지를 인코딩하는 것이다. 음악의 첫 음은 침묵이고 문장의 비어 있는 행간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가느다란 한그루 나무만으로 무대미술을 완성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그것은 한그루 나무라거나, 나무와 달이라고 여겨졌다. 우리는 밤새도록 그 나무를 가지고 조금 더 크게 만들기도 하고 조금 더 작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그 가지를 더욱 가냘프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우리는 서로에게 말했다. ‘글쎄….’”
소리 없이 내리는 밤눈처럼 많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계절. 하이데거는 “깊은 겨울밤 사나운 눈보라가 오두막 주위에 휘몰아치고 모든 것을 뒤덮는 때, 그때야말로 철학을 할 시간”이라고 했다. 마티스는 어둠 속 형체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 감고 있을 때 사물을 더 잘 볼 수 있다”고 했다.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보칼리제가 되고 그리움은 행간에 콕콕 박힌다. 이렇게 압축과 생략을 거듭하는 동안 우리 내면은 이제 다른 세계로의 발걸음을 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내는 이 시간은 참으로 예술적이지 않은가?
억지로라도 자신의 내면을 기어이 들여다보게 하는 깊고 불안한 겨울, 그야말로 비로소 우리가 예술을 할 때다. 어둠을 겪고 난 후라야 빛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듯이 이 시절을 지내고 난 후 지금 우리의 시간이 모여 천편천률의 시가 되고 미래가 될 수 있도록.
주홍미 경기문화재단 문화예술본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