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봄은 산수유의 노란빛으로부터

선운사의 동백이 졌고 남도에서는 매화 꽃비가 내린다. 선홍색, 흰색, 연두색, 분홍색 등 언어로는 미처 다 표현하기 어려운 자연의 원색이 경쟁하듯 빛을 발한다. 인간사 아랑곳하지 않고 꽃잔치가 흥겹다. 기다림 끝에 봄을 맞은 생명의 땀방울들이 꽃잎으로 분분하다. 무릇 절정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다.

봄꽃의 행위들이 삶으로 은유되는 문장들을 만나게 되면 그야말로 삶은 봄과 같고 봄은 삶과 같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은 ‘동백꽃이 지는 모습 자체는 차라리 잔인스럽다. 동백꽃은 송이째 부러지며 쓰러진다. 마치 비정한 칼끝에 목이 베어져 나가는 것만 같다…. 내가 1978년 처음으로 동백꽃 지는 것을 봤을 때, 나는 이 세상의 허망이 거기 있다고 생각했다’고 표현했다. 목련에 대해 김훈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생사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간혹 생각했지만, 거꾸로 절정일 때의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이기도 할 것이다.

필자의 일터인 경기문화재단이 자리 잡은 경기상상캠퍼스에도 봄의 빛이 차근차근 번지고 있다. 가장 먼저 산수유가 피었다.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피어 있었다. 산수유나무가 있는 그곳으로 걸어가다 보면 차분한 평화가 깃든다. 산수유는 고고한 동백이나 화려한 벚꽃과 다르다. 매화나 목련과도 다르다. 산수유는 이 모든 것을 빛나게 하는 어시스트 같다. 가장 먼저 봄의 시작을 알리고, 올 때 그랬던 것처럼 갈 때도 소리 없이 간다. 소리 없이 왔다가 가는 산수유는 마치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의 모습이다. 세상사는 저마다 위치에서 저마다 역할을 하며 조화와 부조화를 이루는 많은 개인으로 이루어진 역사다. 세상이 그래도 살 만하다고 우리가 느끼는 것은 소리 없이 자기의 몫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이 있어서 일 거다. 그래서인지 산수유는 개나리처럼 선명한 노란 빛이 아니라 은은하고 조용한 노란 빛이다. 산수유나무 그늘에 내리는 빛은 마치 평화의 빛과 같다. 고단한 이들의 시름꽃과 주름꽃을 다 감싸줄 것 같은.

남도의 어느 골목 담벼락에서 시작된 봄빛이 이제 온 땅을 비출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기다려 맞은 봄이 갈 날 또한 멀지 않았다. 산수유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또 한 번의 봄을 보내는 연습을 한다. 이 기억을 잘 저장해 두었다가 세상사가 시시해지고 삶이 허망하다고 느껴지는 어느 날에 잘 꺼내어 적절하게 잘 사용하는 연습을.

주홍미 경기문화재단 문화예술본부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