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수원, 부동산에 뭉쳐... 비주류와 소신, 걱정과 기대... 恨 극복한 ‘수인선’처럼 되길
송영길은 대표적 586이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 세대다. 치열했던 젊은 날이다. 그런 그지만 다른 586과 다르다. 보수의 언어라 여기는 ‘성장’을 강조한다. “부자들 돈을 털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일지매ㆍ임꺽정 리더십은 안 된다”(2014년 1월22일). 당내 쓴소리도 그의 몫이다.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를 검토해야 한다”(2019년 1월11일). 대통령 철학에 대한 반박이었다. ‘문빠’가 들고 일어났다. 공공의 적이었다.
그가 당 대표가 됐다. 인천이 정치 고향이다.
김진표는 관료 출신의 상징이다. 국민의정부에서 국무조정실장을 했다. 참여정부에서 두 부총리(경제ㆍ교육)를 했다. ‘영혼 없는 공직자’완 거리가 멀다. 고집 강한 소신파다. “경쟁국가보다 낮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법인)세율을 낮추겠다”(2003년 3월 4일). 당의 방향과도 자주 충돌한다. ‘양도세 중과를 유예하거나 한시적으로 감면해주자’(2021년 1월 정책 건의서). 진보가 그를 싫어한다. 선명성을 들어 자꾸 밖으로 몬다.
그가 부동산특위 위원장이 됐다. 수원 사람이다.
딱히 친하진 않다. 그렇게 보인다. 2018년 몇 달은 경쟁자이기도 했다. 대표 선거였다. 둘 다 낙선했다. 1등은 주류였다. 친노부터 친문을 아우르는 거물이었다. 둘은 그 ‘바위’에 던져진 계란이었다. 안 싸워도 될 수원과 인천이었다. 어차피 2등이든 3등이든 낙선인데. 영영 다른 길을 갈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결합한 것이다. 송 대표가 김 의원을 찾았고, 김 의원도 기꺼이 받았다. 내 칼럼 속 둘은 이렇다.
‘송영길의 신(新) 진보 정신, 답이다’(2014년 1월 23일ㆍ김종구 칼럼). ‘문재인 정부 선공, 김진표 경제당이 답이다’(2018년 7월12일ㆍ김종구 칼럼).
어쩌다가 이런 날을 보게 됐을까. 사고다. 당이 선거에 참패했다. 대통령 인기도 추락했다. 1년 뒤 대선까지 어둡다. 상황이 변했고 주류가 주춤했다. 그래서 이 날이 온 거다. 탈원전을 겨냥했던 송 대표다. 안 그랬으면 당 대표 됐겠나. 시장 경제를 강조하는 김 위원장이다. 안 그랬으면 특위를 맡겼겠나. 위기가 만든 ‘송-김’ 체제다. 그래서 불안하다. 언제 날아들지 모를 칼이 있다. 비주류 대표와 위원장을 향할 주류의 칼이다.
목소리는 이미 냈다. ‘보유세는 강화하고, 거래세는 낮추자.’ ‘종부세 부과 기준을 높이자.’ 지극히 원론적인 방향이다. 세계가 가는 공통의 길이다. 선거로 확인된 여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반대가 많다. 그제는 총리까지 가세했다. 그냥 반대다.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기야 남은 게 있겠나. 20번이나 냈었다. 더 늘릴 공급도 없다. 역대 정권 최대다. 그런데도 이렇다. 이러니 기본으로 가 보자는 것이다. 이게 왜 공격받을 건지….
수인선(水仁線)이 있었다. 수원에서 인천을 오갔다.
1937년 일본인이 만든 사철(私鐵)이다. 수원 쌀과 시흥 소금을 날랐다. 수탈의 상징이다. 해방 후에는 비루했다. 기차에 생선 냄새 쿰쿰했다. 두 냥에서 나는 기적 소리 버거웠다. 청소차와 충돌한 날 기차가 넘어갔다. 그 수인선이 다시 태어났다. 2020년 9월의 일이다. 2조74억원짜리 고급 철길이 됐다. 수원~인천을 90㎞/h로 달린다. 이제 수도권의 대동맥이다. 세계로 가는 출발이다. 80년만에 핀 수인선 역사다.
‘수인선 정치’라고 하자. 수원과 인천이 정치로 연결됐다. 정치의 역사도 철길의 그것을 닮았다. 변방을 돌았었고, 소외됐었다. 그 인천ㆍ수원 정치에 온 ‘작은 별의 순간’이다. 순탄하지는 않을 거 같다. 벌써부터 곳곳에 장애물이다. 반대, 비판에 비아냥까지 나온다. 그렇다고 주눅 들일은 아니다. 인천ㆍ수원 정치는 늘 이랬다. 무시당하고 배척당했다. 그냥 또 그러려니…치면 된다. 묵묵히 가려던 길로 가면 된다.
그렇게 잘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잘 됐으면 좋겠고.
主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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