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7.안양 김중업건축박물관

한국 근현대 건축 거장의 ‘열정 결정체’, 생명의 숭고함 담아낸 서울 서산부인과 평면도
1층 전시실 바닥 그림으로 사용 눈길 사로잡아...2층은 대표적인 건축물 설계도·모형 한자리
‘건축가의 방’ 들어서면 손때 묻은 펜 등 전시, 작품 세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보물창고’

1층 상설전시실에서는 김중업의 일생과 모더니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에게 받은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윤원규기자

안양예술공원은 참 아름답다. 하얀 바위 위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2014년에 개관한 김중업건축박물관이 나타난다.

다리를 건너 박물관 경내에 들어서면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종합안내판을 살펴본다. “박물관 부지는 827년에 조성된 중초사지 당간지주(보물 제4호), 고려시대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과 안양사지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공간이다. 또한 박물관의 건물 일부는 한국 근현대 건축의 거장 김중업(1922~1988)이 설계한 ㈜유유산업 안양공장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안양박물관과 김중업건축박물관은 안양의 뿌리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자 건축가 김중업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장소이다.” 유유산업은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막냇동생 유특한 회장이 설립한 기업이다. 멀리서 건축박물관을 바라보며 김중업에게 설계를 맡긴 기업인 유특한의 안목과 결정이 놀랍다.

 

건물 정면으로 빼낸 캐노피와 측면으로 빼낸 기둥으로 내부 공간을 넓히며 미적으로도 주목받는 김중업건축박물관의 모습. 김중업의 다양한 스케치, 도면, 모형 등 김중업의 건축세계를 만날 수 있다.  윤원규기자

 

■건축은 인간에 대한 찬가입니다

“…참다운 건축이란 인간에게 짜릿한 감동을 주어 끝없는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드라마를 연출합니다. …건축가란 시간과 공간 속에 자신을 송두리째 불사르는 이들입니다.” 건축박물관 앞에 있는 비문의 일부다. 김중업의 건축에 대한 예찬이자 철학인 셈이다.

만나기로 약속한 정재은 학예연구사가 갑자기 일이 생겨 출장을 떠나는 바람에 이명희 학예연구사가 안내를 맡아준다. 김중업건축박물관 옆 동은 안양박물관이다. ‘안양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왓조각을 비롯해 선사시대부터 근현대 안양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 2층 모서리에 설치된 모자상이 다정하다. 이 건물이 본래 공장이었으며, 1959년에 지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파격과 참신함에 전율한다. 당시 김중업은 35세, 유특한은 38세였다. 두 사람의 만남이 빚어낸 작품인 셈이다.

외부로 돌출돼 있는 박물관의 기둥. 윤원규기자

박물관 입구와 로비에 ‘김중업 건축모형 순회전시-주한 프랑스 대사관-부산대학교 본관’이라 새겨진 입간판이 서 있다. “시민들에게 찾아가 김중업의 건축세계를 알리고 박물관을 알리는 기획입니다.” 시민들에게 한발 다가가려는 박물관의 성실한 자세가 고맙다. 1층 전시실 바닥에 인상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서울 을지로 7가에 가면 볼 수 있는 서산부인과의 평면도다. 건물의 구조가 태아가 자라는 엄마의 뱃속을 표현하고 있다! 설계도면을 해설하는 글 제목도 ‘생명의 숭고함을 담아낸 서산부인과’이다. 건물의 외관도 엄마와 가슴처럼 둥글고 부드럽다. “건축은 인체와도 같다”고 강조했던 김중업다운 건축물이다. 전시실에 몇 장의 흑백사진을 만난다. 젊은 김중업이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 건물의 모형을 앞에 두고 찍은 사진도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왼손에 담배가 있다. 그가 1986년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86년 KBS ‘일요방담’에서 화가로 활동하던 홍익대 총장 이대원과 대담할 때도 내내 담배를 피워대던 골초였다. 그는 한국의 전통건축물 중에서 세계에 자랑할 건축물로 종묘를 꼽았다.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던 모양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9월, 서른한 살의 김중업은 한국 건축계를 대표해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리는 제1회 국제예술가회의에 참석한다. 그는 이때 세계적인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를 만나 세계 건축의 경향과 흐름을 배울 기회를 얻게 된다. 기존의 건축 개념을 깨고 오늘날 현대 건축에 적용되는 많은 이론과 기법을 만들어낸 스승이 운영하는 건축연구소에서 3년 2개월을 일했던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샹디가르의 국회의사당, 정부청사, 고등법원, 낭뜨아파트, 롱샹예배당 등을 밤새워 그리고 지우고 야단맞고, 물고 늘어지는 엄청난 시간의 축적이 나를 크게 성장시켜 주었다. 하루 20시간에 가까운 작업들의 연속이었다.”

김중업의 스케치용 수첩들 . 윤원규기자

김중업은 부산대학교 본관, 제주대학교 본관, 서강대학교 본관 등 대학건물을 여럿 설계했다. 계단을 오르면서 사진으로 그가 설계한 건물의 모양을 살핀다. 2층 전시실은 김중업의 대표 건축물들을 평면의 설계도와 모형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건물을 유지하기 어려워 철거했다는 제주대학교 본관은 모형을 통해 만난다. 서강대학교 본관 모형이 산뜻하다. 그는 이 작품에 이런 소감을 남겼다. “58년, 서울대 관사에서 제자들과 작업한 작품이다. 아직 르 코르뷔지에의 체취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의 영향에서 한시바삐 벗어나 혼자의 힘으로 걷고 싶어 하던 시절이었다.”

김중업에게 스승 르 코르뷔지에는 딛고 넘어서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김중업이 프랑스에 있을 때 사용한 수첩이 있다. 불어로 깨알 같은 글이 가득 적힌 수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삼십 대의 김중업은 건축전문잡지 ‘PA’와 ‘주간전망’의 표지 모델이 될 정도로 주목받던 건축계의 기린아였다. 사진 아래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김중업씨’라는 글이 보이고, ‘록큰롤의 유죄’라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낡은 잡지에서 그가 활동하던 196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김중업의 이름을 국내외에 널리 작품은 역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이다. 한옥의 부드러운 지붕선을 살린 대사집무실을 보면 그의 동서양을 융합하려는 의지와 감각이 느껴진다. “건물의 조형과 배치가 한국의 정서와 프랑스의 우아한 품위를 잘 접목했다”는 평가를 받은 이 작품으로 김중업은 1965년 드골 대통령에게 프랑스 국가공로훈장을 받는다.

한국 전통건축의 지붕이 갖는 조형미를 강조한 것으로 평가받는 1962년 완공된 '주한프랑스대사관' 모형 . 윤원규기자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는 공간

‘건축가의 방’에 들어선다. 김중업이 생전에 썼던 안경과 손때가 묻은 자와 펜, 연필, 지우개 같은 물건들이 말을 건넨다. 그의 생각이 어떻게 입체화되는지를 그려볼 수 있는 공간이다. 김중업은 글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성남시(당시의 광주) 개발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다. 결국 고국에서 쫓겨난 김중업은 부인 김병례와 파리에서 생활한다. 9년이나 이어진 고난의 시기에도 그는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홍명조 주택, 외환은행 본점 계획안, 성공회회관 등은 이 시기에 설계한 것이다. 홍명조씨 주택 설계도에 적어 놓은 그의 쓸쓸한 독백이 가슴에 파고든다.

“…이 속에는 그지없이 파아란 하늘이 바람 속에 휘우적거리는 대밭이, 빗물에 젖은 청오동나무잎이, 그리고 빨갛게 피어오르는 연꽃들이 한국의 어질고 티 없이 맑은 어린이들의 까아만 또릿한 눈동자 속에 새겨진 새로운 삶의 찬가이기를 빌며 1973년의 해를 넘기면서 성심껏 제작한 작품이다.”

2층 전시실에서는 김중업이 설계때 사용한 다양한 도구와 도면을 만날 수 있다.  윤원규기자

‘빛과 그림자’란 전시실에 들어서니 유치원 아이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관람하고 있다. 다시 김중업의 ‘건축학 개론’에 귀를 기울인다. “집은 노래를 불러야 한다. 집이 매력에 넘치는 것은 우리들을 희열 속에 끌어올리기 때문이요, 쓸모를 넘어 미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집은 아름다워야 하고 정성어린 공간으로 꾸며져야 하며, 그러기에 예술로 이어야 한다. 현대인의 생활이 기계화하면 할수록 삶의 보금자리인 집은 개성 있는 아름다운 공간으로서 인간을 감싸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건축이란 무엇일까? 김중업은 건축을 “첨단을 걷는 기술을 구사하여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건축박물관을 나와 안양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건물을 다시 둘러본다. 지금 봐도 멋진데, 60년 전 이곳을 드나들었던 직원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이 학예연구사와 박물관에 딸린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박물관의 향후 계획을 들어본다. “내년이 김중업 탄신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기념하는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지요.”

재개발이란 미명하에 천 년의 세월을 지킨 마을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다. 공장 건물을 박물관으로 살려낸 안양시민들의 마음이 빛나는 까닭이다. 내년에 다시 찾아야겠다.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1959년 유유제약 안양공장을 리모델링해 박물관으로 활용한 우측의 김중업건축박물관과 좌측의 안양박물관 전경. 윤원규기자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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