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새와 오동나무를 섬기던 북간도의 작은 마을이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汪淸)현에 있다.
독립군이 처음으로 일본군을 통쾌하게 무찔렀던 곳이다. 봉오동(鳳梧洞) 전투 얘기다. 1920년 6월7일이었다. 승장(勝將)은 여천(汝千) 홍범도(洪範圖) 장군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산과 들녘에서 맹수를 잡았다. 1907년 함경ㆍ평안도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 일본군을 타격했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을 창설, 함경도 혜산진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다. 이듬해 거둔 대첩(大捷)이 봉오동 전투다. 일본군 19사단 추격대대를 섬멸했다.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자도 200여명에 달했다.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그쳤다.
▶같은 해 10월 보복전에 나선 일본군 대부대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합세, 궤멸시켰다. 청산리 전투다. 무장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1921년 1월에는 연해주로 옮긴다. 이듬해는 김규식·여운형 선생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군복을 벗은 뒤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근무했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쫓겨갔다.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항일 무장투쟁에서 첫손에 꼽혔지만, 해방 후 남북한 모두에서 소외됐다. 북한에선 김일성과 비교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남한에선 옛 소련 영토에서 활동했다는 연유였다. 정부는 1962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정부는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카자흐스탄 측에 유해봉환을 위한 협조를 요청해왔다.
▶정부가 유해봉환계획을 공표한 건 지난해였다. 코로나19로 미뤄졌다. 그러다 이번에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이 성사되면서 장군의 유해가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만주벌판 등지를 누비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백두산 호랑이’의 귀환이다. 100년만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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