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성ㆍ편파 등 갖가지 위험... 이미 선거판 유력 유튜브 접수, 2022년 유튜브勢로 승부 날 것
코로나19가 모든 걸 바꿨다. 퇴근 후 생활이 더 그렇다. 시간도 공간도 ‘집콕’이다. 실태를 조사한 통계가 있다. ‘집에 있는 시간이 증가했다.’ 예상대로 87%가 답한다. 늘어날 개인 시간에 뭘 보냐고 물었다. ‘유튜브 등 온라인 영상 시청이 늘었다’. 79%가 대답한다. 유튜브 등의 매력을 물었다.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다’(62%). TV보다 다양한 주제와 콘텐츠를 담고 있다(41%). 지금 중년 직장인은 유튜브에 깊이 빠져 있다.
그 유튜브가 더 폭발하고 있다. 대선을 만나서다. 그럴만한 매력이 있다. 속 시원한(?) 편파 방송이다. 균형이나 중립 따윈 신경 안 쓴다. 언론은 상상도 못한 편들기 방송이다. 진실과 왜곡의 경계도 맘대로다. 제목부터 선정성 경쟁이다. ‘○○○ 감옥 간다’ ‘△△△ 난리 났다’…. 듣고나면 별 내용 아니다. 그런데도 수만 조회씩을 챙긴다. 욕하면서도 찾게 되는 중독성인가 보다. 밍밍한 정규 언론은 설 자리를 잃어 간다.
TV 토론 평가가 딱 그 짝이다. ‘이쪽 후보’가 더듬댔다 치자. 그래도 ‘이쪽 유튜브’는 극찬한다. 더없이 차분했다고 평한다. ‘저쪽 후보’가 매섭게 공격했다 치자. 그래도 ‘이쪽 유튜브’는 나쁘게 평한다. ‘저질 질문이었다’고 한다. 2~3시간 걸리는 토론회다. 전부 볼 사람이 몇이나 되나. 다들 후평(後評) 듣고 점수 매긴다. 그렇게 중요한 후평인데 다 뒤엉켰다. 유튜브가 엉망진창을 해놨다.
나쁜 선동가가 있었다. 나치스 괴벨스다. 국민에게 라디오를 사줬다. 거기에 나치즘을 주입했다. 모든 국민의 눈ㆍ귀를 가렸다. 거대 악(惡)-유대인 학살-을 방조토록 했다. 훗날 ‘좋은 선동가’가 이런 분석을 내놨다. ‘사람은 자유 의지로만 행동할 수 없다. 반복된 미디어에 지배를 받는다’(에드워드 버네이스). 그렇다. 한국 대선판에 괴벨스가 어슬렁거린다. 유튜버라 불리는 괴벨스다. 그 괴벨스들의 먹잇감은 왜곡된 표심이다.
이쯤 되면 비난해야 한다. 일부 유튜브의 범죄적 왜곡을 경고해야 맞다. 그런데 그러기 무섭다. 너무 많이 컸다. 대선판이 이미 그들 손에 들어갔다. 막강한 영향력이 곳곳에서 발휘된다. 나쁜 여론도 좋게 바꾼다. 나쁜 짓도 통째로 덮는다. 후보와의 짬짜미는 오래전에 끝났다. 지지자들에 유튜버는 교주다. 논평은 설교다. 유튜브 대선이다. 유튜버들에게 넘어간 대선이다. 어른거리는 데자뷔가 있다.
다른 듯 닮은 추억, 노무현 추억이다. 중심에 노사모가 있었다. 인터넷으로 뭉친 조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깔아준 밑거름이다. DJ 국정엔 이런 목표가 있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브로드밴드다’(소프트뱅크 손정의). 인터넷 가입자 1천만명 시대가 됐다. 그 1천만을 움직이는 노사모였다. 한나라당만 몰랐다. 돈 선거를 계속했다. 지고 나서야 당이 인정했다. ‘이번 대선은 인터넷 선거였고, 우리는 거기서 졌다.’
이제 유튜브는 오락이 아니다. 내용과 주장에 동의해가는 학습이다. 앞선 설문에도 이런 답변이 있다. ‘유튜브 등 온라인 영상 콘텐츠를 통해 무언가 배울 수 있다(26%).’ 정치로 오면 선택이다. 후보가 좋아질 수도 있고, 후보가 싫어질 수도 있다. 유권자 70%가 유튜브 앞에 있고, 그 70%의 26%가 동의할 준비가 돼 있다. 아주 오랫동안 한국 대선은 ‘1% 승부’였고, 이번에도 그렇다. 그래서 더 저들의 위세가 더 커 보인다.
(섣부른 일반화로 모두에 화를 미칠 의도 없습니다. 본 칼럼은 노력하고, 취재하고, 공부하는 유튜브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슈퍼챗이나 구걸하고, 말장난이나 늘어놓고, 주작질이나 일삼는 유튜브는 논리에 넣지조차 않았습니다-필자 註)
主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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