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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사람, 남겨진 마을] 기름진 평야 장호원… ‘규제 그림자’ 덮치다
문화 G-Story

[사라진 사람, 남겨진 마을] 기름진 평야 장호원… ‘규제 그림자’ 덮치다

임금님 ‘진상미’로 유명한 곡창지대... 동서횡단도로 교차해 한때 교통 요지 
현재 자연보전권역 분류, 개발 막혀... 옆동네 비수도권 충북 감곡은 발전 ‘대조’

“수확기가 빠르고 식미(食味)가 좋아 구한말에는 왕의 진상품이 됐다”. <이천대관>(1955)에 나오는 이천시 장호원읍의 ‘진상미’ 이야기다.

이천은 예로부터 쌀의 도시로 알려졌다. 남한강 지류인 청미천 안에 자리 잡은 장호원 마을이 특히 유명했다. 장호원은 강 유역을 따라 곡저평야가 발달하고 곡창지대로서의 자연적 조건을 모두 갖춘 곳으로 농사가 번영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한때는 사통팔달의 핵심이기도 했다. 서울ㆍ충주ㆍ부산을 잇는 국도와 평택ㆍ제천ㆍ영월을 잇는 동서횡단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가 바로 이곳 장호원이었다. 경기도 최동남단에 위치해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과 도계를 이루는 접경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장호원의 성장이 멈춰 섰다. 원주민들은 외지로 떠나고 출생률은 늘지 않으면서 인구가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주된 원인은 수도권정비계획법에 따른 지역 발전 규제다. 현행법상 자연보전권역으로 분류된 탓에 대학교도, 공장도 세울 수 없어 발전 동력을 잃은 것이다.

옆 동네 감곡이 역세권 개발을 추진하며 날로 발전하는 것과 달리 장호원은 미곡ㆍ과수 농사만 한다. 음성은 비수도권, 이천은 수도권이라서다.

5년마다 재검토할 수 있는 수도권정비계획도 수십 년째 그대로다. 장호원은 규제를 풀어 지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외친다. 평일엔 회사로 출근하고, 주말엔 논ㆍ밭일을 하는 ‘농사의 부업화’를 주장한다. 수도권의 그림자인 이천시 장호원읍을 찾아갔다.

[G-Story] 마을편 ②법 없이도 사는 동네, 법 때문에 우는 동네: 이천시 장호원읍

수정법에 꽁꽁 묶여… 농사 외엔 비전 없어요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9월의 어느 노을녘. 흙 묻은 바짓단 한쪽을 무릎까지 걷고 머리엔 보자기를 뒤집어쓴 까무잡잡한 김씨 어머니를 따라갔다. “이 동네, 어떤 동네인지 알고 싶어서요”라는 말에 김씨 어머니는 “별 희한한 아가씨 다 있네” 하곤 잰걸음으로 앞장섰다. 꽉 찬 사과 박스를 들고 40m쯤 발길을 옮겼을까. 정미소 근처 돌담에서 미리 김씨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던 다른 어머니 3명을 만났다. “누구유?”를 시작으로 그들과 ‘희한한 아가씨’의 대화가 이어졌다. 한창 ‘자기소개’를 하고 잡담을 나누다가 “장호원이 경기도 동남쪽 끝이라면서요. 다리 하나만 건너면 충북이라던데” 하니 순간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어머니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내 큰 목소리로 깔깔거렸다. “여기가 그 충북이여.”

 

곡식 산출이 많은 이천시 장호원읍의 주민 셋 중 하나는 미곡이나 과수 등 1차 산업 위주의 농산물을 주 소득원으로 한다. 장호원읍 선읍1리 마을 어귀에 ‘쌀, 복숭아의 고장’ 문구가 새겨진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조주현기자
곡식 산출이 많은 이천시 장호원읍의 주민 셋 중 하나는 미곡이나 과수 등 1차 산업 위주의 농산물을 주 소득원으로 한다. 장호원읍 선읍1리 마을 어귀에 ‘쌀, 복숭아의 고장’ 문구가 새겨진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조주현기자

■ 걸어서 2분… 경기도와 충청북도 사이에 있는 마을

경기도 최동남단에 위치한 이천시 장호원읍은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과 도계(道界)를 이룬다. 청미천 위 장호원교를 기준으로 한 곳은 경기도, 한 곳은 충청도다. 직선거리로 200m 남짓, 도보로 2분 정도만 걸으면 지역이 바뀌는 동네다.

현재 이천 장호원읍에는 송산리, 풍계리, 진암리 등 52개 행정리가 있고 1만4천69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이들 주민 셋 중 하나는 미곡이나 과수 등 1차 산업 위주의 농산물을 주 소득원으로 한다. 장호원읍 내 6천586세대 중 1천838세대(28%)가 농가이고, 면적 60.36㎢의 절반 이상이 농경지(23.84%)와 임야(23.41%)일 정도다.

주민들이 장날 포장마차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주현기자
주민들이 장날 포장마차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주현기자

‘토지가 비옥하고 흉풍을 타지 않는 고장’이라던 장호원답게 농사가 번영하는 데에는 지리적 여건이 큰 몫을 차지한다. 청미천 물길을 따라가면 여주강을 거쳐 한강이 나오는 데다가, 1904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사통팔달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덕에 옛날옛적부터 “수량이 많고 곡식의 산출이 많은 지역”으로 불리곤 했다. 오늘날 이천 쌀과 복숭아 등이 유명한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장호원읍과 직선거리로 불과 200m 떨어진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는 대학 및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사진은 극동대학교와 이테크(e-Tech)산업단지 모습. 조주현기자
장호원읍과 직선거리로 불과 200m 떨어진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는 대학 및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사진은 극동대학교와 이테크(e-Tech)산업단지 모습. 조주현기자

■ ‘자연보전권역 이천시’ 수도권 규제 발 묶였다

장호원이 농사하기 좋은 환경이라 농사만 하느냐. 그건 아니다. 사실상 농사 말고는 다른 먹을거리를 찾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농사를 해야만 한다. 젊은 직장인들은 ‘기업’을 찾아 서울이나 청주로 장거리 출퇴근에 나서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학교’를 찾아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간다. 이러한 문제의 중심엔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있다.

1982년 제정된 수도권정비계획법은 서울, 인천, 경기도에 과도하게 집중된 인구와 산업을 적절하게 배치하기 위해 탄생했다. 주택 및 토지, 교통, 교육 등 각종 항목을 마냥 개발할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에서 조절하거나 통제해야 한다는 목적을 품었다. 이 법에 따라 수도권에서 수립하는 모든 토지이용계획은 수도권정비계획에 부합하게 수립돼야 한다. 수도권정비계획은 5년마다 재검토하고 필요한 경우 변경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으나, 현실은 수십 년간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수도권 사람과 비수도권 사람의 마찰 탓에 개정안이 숱하게 발의됐다가, 폐지되길 반복했기 때문이다.

 

장호원읍과 직선거리로 불과 200m 떨어진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는 대학 및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사진은 극동대학교와 이테크(e-Tech)산업단지 모습. 조주현기자
장호원읍과 직선거리로 불과 200m 떨어진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는 대학 및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사진은 극동대학교와 이테크(e-Tech)산업단지 모습. 조주현기자

그 결과 지금의 수도권은 ‘과밀억제권역’, ‘성장관리권역’, ‘자연보전권역’으로 나뉘고 있다. 경기도로 한정해보면 수원시ㆍ성남시 ㆍ고양시 등이 과밀억제권역이고, 평택시ㆍ안산시ㆍ오산시 등이 성장관리권역이다. 가평군ㆍ양평군 등과 함께 이천시는 자연보전권역으로 분류된다. 장호원 역시 자연보전권역에 해당해 수도권정비계획법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긴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 대학ㆍ산단 키우는 감곡, 역차별 호소하는 장호원

오랜 시간 지역민들은 장호원을 규제 대상에서 풀어달라 주장했다. 옆 동네인 감곡면은 비수도권이라 대학교와 대규모 공장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데 장호원은 그렇지 못해 역차별이라는 이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감곡면에는 강동대학교ㆍ극동대학교와 같은 학교는 물론 상우산업단지ㆍ이테크(e-Tech)산업단지 등 기업체들이 조성되거나 조성되고 있다. 특히 음성군이 충북혁신도시를 발판 삼아 ‘2030 음성시(市) 승격’을 목표로 총력전을 펴고 있는 만큼, 감곡면 역세권 개발 사업도 추진하면서 양 지역 간 격차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장호원의 질투 어린 볼멘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감곡면은 장호원보다 큰 동네일까. 그것도 아니다. 감곡면에는 지난해 6월 기준 9천912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행정리는 40개다. 장호원보다 인구 5천 명가량이 적은데 기반시설 여건은 한결 나은 셈이다. 면적은 감곡면(69.4㎢)이 장호원보다 큰 편이지만 농경지가 13.5%, 임야가 41.1%로 토지 구성은 얼추 비슷하다. 장호원은 “감곡이 성장해선 안 된다”는 게 아니라 “감곡처럼만이라도 규제를 풀어달라”고 말하고 있다.

 

■ 읍 승격 80주년…“수도권 규제 풀고 희망 찾아야”

한숨이 날로 깊어지는 장호원은 올해 읍으로 승격한 지 80주년을 맞았다. 민선 7기 엄태준 이천시장은 변변한 문화시설과 스포츠센터조차 없던 장호원을 살리기 위해 300억원을 들여 복합문화스포츠센터를 건립하기로 했다. 동시에 장호원의 재도약을 위해 수도권정비계획법과 같은 규제가 풀어져야 한다고 한층 강조한다.

물론 지역 내에서도 그간의 경험을 통해 법 개정 등 급격한 변화가 어렵다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지역 발전 차원에서 행정ㆍ재원적 지원을 보태기 위해 정부와 광역지자체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에요. 먹고살 희망이 있어야 사람들이 터전을 꾸리러 올 텐데 지금은 농사 말고는 없으니까 (안 오죠)…. 충청남도 천안과 맞닿아있는 평택시하고는 상황이 달라요. 거긴 경기 남부지역이라 이런저런 기업이라도 많지, 장호원은 아니에요”. 김경중 이천시 장호원읍장은 말했다. 그러면서도 끝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자연부락의 삶이 망가지면 다른 곳에도 여파가 가서 공생이 힘들어져요. 규제를 푼다고 수도권이 무조건 잘 살게 되는 게 아니에요, 동네와 마을을 살리는 건 지자체의 몫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할 테니 규제를 풀어달라고 하는 거죠. 여기 사람들 정말 좋아요. 법 없이도 사는 동네에요. 기반만 갖춰주면 ‘죽음의 도시’를 벗어나 활기찬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겁니다.”

G-Story팀=이연우기자, 민경찬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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