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전설, 박종서의 열정과 꿈 ‘결정체’
박 관장, 한국인 최초로 영국왕립예술학교서 수학... 페라리의 명인 스칼리에티에게 배우고 수석 졸업
35년간 스쿠프·티뷰론·쏘나타·싼타페 등 선보여, 디자인 전공자·현대-기아차 신입사원들 필수코스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자동차디자인미술관 포마(FOMA: Form of Motors and arts 관장 박종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립 자동차 디자인 미술관이다. 이용익 건축가가 디자인한 미술관은 자연의 생태학적 순환원리인 패시브 공법이 적용되어 전기와 물을 생산하는 자급자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설립자 박종서 관장은 현대자동차 디자이너로 일하던 1979년 ‘포니정’으로 불리는 정세영 회장의 배려로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s)에서 한국인 최초로 수학하는 행운을 얻었다. 페라리 자동차를 만든 명인 스칼리에티에게 디자인을 배우고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현대차와 기아차에서 35년 동안 스쿠프, 티뷰론, 소나타, 산타페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자동차들을 연이어 선보이며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04년부터는 국민대학에서 10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2019년 디자인코리아 ‘디자이너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에 선정되었으며, 대한민국산업디자인협회 회장과 대한민국브랜드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 자동차 디자인의 모든 것: 과거 현재 미래
2016년에 1종 사립미술관으로 등록된 포마자동차디자인미술관은 디자인 전공자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신입사원들의 필수코스로 자리 잡았다. 자동차 선진국에도 자동차디자인을 주제로 한 미술관이 없어서일까,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리움미술관과 포마미술관을 연결하는 관광코스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런데 놀랍게도 미술관의 진입로가 자동차는커녕 걷기도 불편한 좁은 흙길이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현실 앞에 말문이 막힌다. 주민들이 수십 년 동안 사용했던 도로의 주인이 바뀌면서 벌어진 황당한 일이다. 대한민국 자동차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자동차 디자인 전문의 1종 사립미술관을 이렇게 방치해도 될까? 고양시가 나서서 해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미술관 전시실에 들어서면 커다란 앵무조개의 형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명함에도 새겨진 디자인이다. 1대 1.618의 황금분할이 자연에 있다는 사실을 깨쳐주려는 설립자의 철학이 담겨 있다. 자동차 디자인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페라리 제작 모형과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인 ‘포니 목형’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현대자동차에조차 남아 있지 않은 포니 원형의 1대 1 크기 엔지니어링 도면도 있다. ‘포니’의 목형과 동판에 새겨진 설계도 앞에 선다. 포니는 한국 자동차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나 설계도가 남아있지 않아 박 관장이 심혈을 기울여 복원한 것이다. 전시실 중앙에 전시된 신형 스포티지 클레이 모형은 기아자동차가 기증한 것인데 실제 제품이 양산되기 전 모델이다. 전시실을 안내하면서 박 관장은 안목과 기초를 거듭 강조한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안목입니다. 안목을 키우려면 흙, 나무, 종이 등 기본 물질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이것은 학습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대학에서 디자인 공부를 한다는 것은 10년, 20년 후에는 못 쓰는 지식을 배우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를 ‘지식의 반감기’라고 하는데, 지식이 반감되지 않으려면 내 손으로 만든 기억이 있어야 합니다.” “미래에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 나와야 합니다. 쓸데없는 것,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떼어내는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차의 형태가 지금과 같은 까닭은 앞쪽에 엔진과 미션이 들어가고 뒤쪽에 트렁크가 있기 때문이지요. 전기자동차라면 앞쪽이 비어도 되니, 현재의 자동차 모습일 필요가 없습니다. 크기도 지금처럼 클 필요가 없어요. 현재 ‘패키지 레이아웃’은 가솔린 자동차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모양과 디자인이 모두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테슬라도 그대로 하고 있어요. 관념에 묶여 제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도자기들이 정갈하게 진열된 공간이 상당한 운치가 느껴진다.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한 기둥은 박 관장이 직접 만든 작품이다. 연구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수종사 은행나무를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살펴보니 그림 하단에 박 관장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무를 다듬어 만든 작품도 여럿, 눈에 띈다. 설립자의 예술적 향기를 미술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예술 디자인 관련 외국잡지와 영문으로 쓰인 도록들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에서 일본어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제목이 ‘디자인 국부론’이다.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디자인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철학을 세웠습니다. 이 책은 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준 책입니다.”
박 관장의 아들도 자동차 디자이너이다. 아버지처럼 RCA를 졸업하고, 페라리와 벤츠를 거쳐 현재 아우디에서 일하고 있다. 자녀 교육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아들을 키울 때 자연을 많이 접하게 했습니다. 아이가 커다란 종이에 그림을 그릴 때 나도 같이 그렸지요. 그런데 아들은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내가 그것을 모아 유학 준비를 하는 아들에게 ‘이게 네 진짜 그림’이라며 건네줬지요. 덕분에 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이제 진실한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내게 많이 감사하지요.” 박 관장은 모든 형태는 자연을 따른다는 생각을 담은 책 ‘꼴, 좋다! 자연에서 배우는 디자인’을 펴내기도 했다. 미술관 뒤에 있는 500평(1천652㎡) 규모의 정원을 영국의 채리티 가든(Charity Garden)처럼 가꾸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험실의 모습. /6. 차량 디자인에 사용되는 다양한 색감의 판넬. 윤원규기자
■ 풍뎅이와 돌고래가 디자인의 샘
전시실 입구에 곤충과 나비들이 전시돼 있다. 곁에 돋보기도 놓여 있다. 관람객들에게 자연 고유의 색상의 신비로움과 다채로움을 보여주고 싶은 까닭이다. 미술관 입구에 네온사인으로 만든 카멜레온이 연신 색깔을 바꾸고 있다. 디자이너가 되려면 색에 대한 감각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박 관장은 아반떼와 티뷰론, 싼타페를 디자인할 때 풍뎅이의 선과 색을 많이 참고했다. 자동차 도색도 풍뎅이와 비슷한 색으로 입혔다고 한다.
자연의 색, 모양, 냄새, 촉감을 느끼고 이해할 줄 알아야 창의력이 커진다는 믿음이 확고하다. 유리, 나무, 금속, 흙, 관찰법 등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꾸준하게 운영하는 것도 이러한 신념 때문이다. 1984년쯤 돌고래 몸통에서 선을 딴 콘셉트카 디자인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를 본 미국 딜러들이 빨리 차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티뷰론이다. “티뷰론과 쏘나타3, 싼타페의 공통점은 돌고래 몸통에서 나온 매끈한 곡선입니다.”
박 관장은 미술관을 열기 전 작업실에 틀어박혀 실제와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옛날 명차를 복원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차체와 1대 1 크기로 목조틀을 만들고, 여기에 알루미늄판을 입혀 망치로 두드리는 손작업을 거쳐 1958년식 페라리250 테스타 로사, 1938년식 알파 로메오 같은 전설의 이탈리아 명차를 재탄생시켰다. 옛날 설계도를 뒤지고, 이탈리아 장인들에게 직접 물어가며 수제 방식을 복원했다. 그는 손과 연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창의력은 손과 머리에서 나온다. 우리는 미래를 일구기 위해 다시 손으로 그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동차 디자이너는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 개성 있고 숙련된 표현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
포마미술관에서는 현재 유리 공예가 5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을 방문하려면 온라인으로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오는 31일에 이예승 고려대 교수가 미디어 아티스트를 강의하는 “디자인 콘서트”가 열린다. 다음 달 20일에 진행되는 어린이 및 청소년들을 위한 무동력 모형차 레이싱 대회가 열린다. 17m에 달하는 초대형 슬로프 트랙 위에서 자신이 만든 모형 차를 출전시키는 대회로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꼭 자동차와 관련된 꿈이 아니어도 좋아요. 과학자가 될 수도 있고 미술가가 될 수도 있지요. 그 꿈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연필로 꿈을 그리듯 이곳이 모두의 꿈을 그릴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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