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K와 식사 중이었다. 주고받은 낮술이 거나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입으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지사님 국제 전화에요.” 해외 순방 중인 L지사다. 그때 도청은 시끌벅적했다. L지사 임기가 한 달 남았다. 그 상황에서 인사를 했다. 국장급을 새로 임명했다. 도지사 당선자 S가 펄쩍 뛰었다. 알박기 인사라며 맹비난했다. 그 상황을 묻는 국제전화였다. 조용한 장소라서 대충 들렸다. 지사 목소리가 컸다. 강하게 대처하라고 주문했다.
K는 지사 측근이다. L지사가 데려온 공무원이다. 요새 말로 풀면 어공(어쩌다 공무원)이다. 그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는 그런 줄 알았다.) ‘당선자에 강하게 받아치라’는 명령이었다. 그 대목에서 예상 밖 광경을 봤다. 너무 의외라 세월이 지났어도 기억이 선명하다. “당선인 쪽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되레 당선자 쪽 주장을 두둔했다. 강하게 나가지 않겠다고도 했다. 항명이었다. L지사가 말을 더듬었다. 내 기억 속 한 조각이다.
어공에 숙명이 있다. 지금 또 그런 때다. 경기도청 내부 게시판이 있다. 공무원들만의 소통 공간이다. 거기 글이 올랐다. ‘민선 7기 출범 시 캠프 및 성남시 등에서 도청에 입성하실 분들.’ 이재명 측근들을 지목하고 있다. 떠나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 ‘지사님도 사임하셨는데 아직도 도청에서 자리 잡고 계시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간의 불만을 넌지시 설명한다. ‘뒷 배경 믿고 직원들에게 갑질하셨던 분들…스스로 정리해야 한다.’
댓글이 여럿 붙었다. ‘따라지들 들어오면서 갑질할 때는 마치 계엄군이 신발도 안 벗고 들어와 설친다는 기분이 들었다. 남 앞길 막지 말고 퇴사하세요.’ 이형기의 시, ‘낙화’도 등장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놀랍지도 않다. 공조직의 관행이다. 어공은 철저히 어공으로 대한다. 임기 동안 충분히 모신다. 임기 끝나면 냉철히 외면한다. 그래서 내보낸다. 그게 시작된 것이다.
버티면 주군이 다칠 수 있다. 이재명 지사는 이제 대통령 후보다. 경쟁할 상대가 명확하다. 국민도 둘로 갈라졌다. 공직사회도 갈라졌다. ‘나가라’고 쓴 저 사람, ‘갑질했잖냐’고 쓴 저 사람…. 아마 이재명 지지자는 아닐 거다. 맞서봐야 좋을 거 없다. 더 험한 댓글만 따를 거다. 이 전 지사를 향한 험담만 나올 거다. 그걸 기다리는 세력이 도청 주변에 진쳤다. 이재명 비리 수집꾼들이다. ‘공직-어공’ 싸움에서 떨어질 콩고물을 고대한다.
당사자가 받을 상처도 크다. ‘뒷 배경 믿고 갑질하셨던 분들’ ‘신발도 안 벗었던 계엄군’…. 겁박의 시작이다. 공조직이 숨겨온 관성이다. 출근길에 계곡을 지난다. 현수막이 요란했다. ‘이재명ㆍ계곡 칭송’ 일색이었다. 그게 싹 없어졌다. 날짜가 공교롭다. 이 전 지사 퇴임 직후다. 소름 돋는 광경이다. 그런 공직사회에 주군 없이 남아 뭘 하겠나. 서먹함이 적대감 되고, 서운함이 배신감으로 커지기밖에 더하겠나.
그때, K는 계획이 있었다. 연명(延命)하는 거였다. 일단은 성공했다. 조용한 자리를 새로 받았다. 신임 지사가 준 선물이었다. 대가가 혹독했다. 도청 주변에 구설이 돌았다. ‘민망한 사생활’ 구설수까지 퍼졌다. 떠났다면 안 받았을 모욕이다. 오래도 못갔다. 그도 잘렸다. 그에게 배웅자는 없었다. ‘낮술 친구’와도 인사 없이 갔다. 주군 버리고, 신뢰 버린 K. 그 대가로 근무 몇 개월ㆍ월급 몇 푼을 더 받은 K. 궁한 역사의 예(例)다.
민선 지사 30년이다. 그 30년을 취재했다. 이쯤 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공식이다. ‘주군의 임기가 어공의 임기다.’ 토론이 필요하지 않다. 따질 것도 없다.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손학규 오니 임창렬 사람들 떠났다. 남경필 오니 김문수 사람들 떠났다. 이재명 오니 남경필 사람들 떠났다. 그 시간이 또 왔을 뿐이다. 비켜줄 때다. 딱히 손해본 것도 없다. 어차피 그 자리도 3년 전 누군가를 쫓아냈던 거니까.
主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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