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가

농경사회에서 노인은 지혜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내세워 윤리의 기본으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기로소(耆老所ㆍ나이 많은 정2품 이상의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를 둬 노인우대정책을 펴는 등 경로효친을 크게 강조해 온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노인이 되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생활수준 향상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노인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는 나라로 꼽힌다. 국회 예산정책서 자료에 따르면 2040년 기준 노년부양비가 64.9라고 한다. 만 15~64세 생산가능인구 100명당 부양해야 하는 65세 이상 인구가 64.9명이라는 것이다. 2020년 기준으로는 22.3이니 2.9배 늘어난다는 추산이다.

이제 문턱까지 다가온 초고령 사회에서 노인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노인들의 경험과 지혜는 더 이상 현대사회에 통하지 않는다. 노인은 무기력과 빈곤의 상징처럼 비춰지는 대상일 뿐이다.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코언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에 등장하는 보안관 벨은 “세상이 많이 변했다”라는 대사를 자주하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느덧 노인이 된 보안관 벨은 예측불허의 살인범 안톤 쉬거를 잡는데 더 이상 도움이 안 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예측불허의 현대사회는 마치 영화 속의 무자비한 살인범 안톤 쉬거와 같다. 메타버스니 인공지능(AI)이니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디지털 사회에서 노인들이 적응할 여지는 점점 사라져 간다.

늙음을 애써 부정할수록 우리는 늙음에 얽매이게 된다. 71세를 맞이한 다산 정약용은 ‘노인이 되어서 유쾌한 일’이라는 시를 통해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통념을 시원스레 날려버리고자 했다. “대머리가 된 것이 유쾌한 까닭은 머리를 감거나 빗질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기 때문이며, 이가 모두 빠진 것이 유쾌한 까닭은 치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라고 다산은 말한다. “눈이 어두운 것이 유쾌한 까닭은 책을 보거나 학문연구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며, 귀가 먹은 것이 유쾌한 까닭은 세상의 온갖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니, 이 얼마나 유쾌한 일이냐”고 되묻는다.

2021년 신축년도 어느덧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더 이상 젊지 않아도 되는 노년의 자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정성희 실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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