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물렀거라, 범 내려온다

코로나19의 기승이 여전한 가운데 2021년 신축년(辛丑年) 소의 해가 저물고 있다. 다가올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으로 호랑이띠의 해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무서우면서도 친숙한 동물이었고, 우리나라와 민족을 표상하는 동물이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고 고개를 지키던 호랑이, 오누이를 잡아먹기 위해 나무를 오르던 호랑이, 곶감을 무서워하는 호랑이 등 어린 시절 들었던 설화 속의 무수한 호랑이가 있다. 호랑이는 항상 우리 주변에서 어떤 때는 인간을 죽이는 공포의 대상으로, 어떤 때는 인간이 비는 산신으로, 어떤 때는 친근한 할아버지로서 우리와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마늘과 쑥의 전쟁에서 곰은 고통을 참고 인간이 됐지만, 호랑이는 인간이 되는 일에 실패했다. 환웅과 결혼해 단군을 낳은 것은 호랑이가 아니고 곰이다. 단군신화만 놓고 보자면 우리는 호랑이가 아니라 곰의 자손이다. 그런데 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상징 동물이 곰이 아니고 호랑이일까? 호랑이가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까닭은 국토의 3분의2가 산이고, 산에 많은 호랑이가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호랑이가 많은 만큼 물론 호환(虎患)도 많았다. 많은 사람이 집에서 생활하다가, 산에서 나물 캐다가, 밭 갈다가, 김매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경기의 어느 고을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백성이 전쟁으로 죽은 백성만큼 많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호랑이에 물려 죽는 호환(虎患)이 다반사인데도 우리 조상은 민화(民畵)에 무서운 호랑이를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그렸다. 이런 여유와 반전을 두고 미국의 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1996)은 한국 미술사의 클라이맥스라고 극찬한 바 있다.

호랑이는 십이지(十二支) 중에 세 번째인 인(寅)에 해당하고, 인월(寅月)은 음력 정월이다. 정월의 의미뿐만 아니라 호랑이가 사악한 기운을 막아 주리라는 이른바 벽사(<8F9F>邪)의 믿음도 민간신앙으로 있었다. 호랑이를 그린 부적, 호랑이 발톱으로 만든 노리개, 호랑이 혼백의 상징인 호박을 마고자 단추로 썼고, 밥주발, 필통, 연적, 벼루, 베갯모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빨랫방망이에도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이 쓰는 굴레나 호건 등에 수놓은 호랑이 장식도 모두 벽사를 위한 것이었다.

호돌이와 수호랑에서 보듯이 호랑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지금도 여전해 88서울올림픽과 평창동계올림픽의 마스코트로도 활용됐다. 여전히 우리 역사 속에서 범은 내려오는 중이다. 코로나19야 썩 물렀거라. 

정성희 실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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