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공원은 1933년 일제강점기 경성부립공동묘지에서 출발을 한다. 일제는 1912년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 규칙’을 제정하고, 1920년을 전후해서 경성부립공동묘지를 도성 밖 다섯 곳에 조성한다. 광희문 밖 신당리와 수철리(지금의 금호동), 서대문 밖 아현리와 신사리, 남대문 밖 이태원 등으로 총 52만평에 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태원과 신당리가 가득차자 대체지로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와 고양군 숭인면 길음리가 선정됐다.
1930년대에 들어서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늘자 경성부는 택지조성에 박차를 가한다. 이태원공동묘지가 택지로 포함되자 1931년 4월부터 묘지 사용을 금하고, 천장지로 망우리와 미아리를 택정했다. 경성부는 1933년 경기도로부터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 일대의 임야 75만평을 무상으로 매입하고는 52만평 규모의 묘역을 조성한다고 공표했다. 1933년 6월10일 드디어 망우리공동묘지의 시대가 열렸다. 이후 도산 안창호·만해 한용운·소파 방정환·호암 문일평·위창 오세창 등 독립유공자와 우두를 도입한 지석영,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설의식, 김상용·계용묵·김말봉·최서해·박인환 등 문인과 이인성·이중섭·권진규 등 미술가 등 근현대 선각자 60명이 이념과 함께 이곳에 묻혔다. 1973년 4만7천기로 만장이 되자 공동묘지로서의 역할을 마친다. 현재는 6천7백여기가 남아있다. 망우리공원, 망우리사색공원, 망우리인문학공원, 망우리역사공원으로 이름이 바꾸면서 근현대 인문학 보고로 우뚝 서있다.
이 공원은 구리시와 서울시 중랑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요인물 중 3분의 2가 구리시에 속한다. 등록문화재 9기 중 6기, 기미독립만세운동 33인 중 3인의 묘역이 구리시 교문동에 주소를 두고 있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중랑구는 휴게시설과 가로등, 화장실은 물론 산책로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만 구리시는 앉을 의자도 부족한 상황이다. 중랑구는 작년에 망우리공원과를 신설해 체계적인 관리에 들어갔고 종합안내소도 준공을 앞두고 있다. 반면 구리시는 어떠한가. 시 소속 문화관광해설사들이 머물 곳도 탐방시설도 편의시설도 소원(疎遠)할 뿐이다.
망우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설화에서 태조가 죽어서 묻힐 건원릉 터를 얻고서는 ‘근심(憂)을 잊었다(忘)’해 만들어진 지명이다. 묘역을 돌면서 근심이 늘어나는 것은 왜일까. 구리시는 한때 고구려를 두고 광진구와 역사전쟁도 겪었다. 이를 뼈아픈 기억으로 삼고 망우리공원을 가슴에 담을 때다.
한철수 시인ㆍ구지옛생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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