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초정 박제가를 배우자

2022년은 한중수교 30주년을 맞이하는 중요한 해다. 지난 30년간 한중관계는 경제와 문화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으나, 국민 정서를 포함한 양국관계는 가깝지만 친하지 않은 근이불친(近而不親)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과 소원해진 때는 역사를 통틀어 극히 단기간이었다. 우리는 30년 후 다음 세대가 살아갈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환경을 우호적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오늘날 중국의 규모는 과거처럼 여전히 크고, 그 속에 혼재해 있는 다양한 요소들은 더욱 많아졌으며,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중국은 더 이상 하나의 잣대로 살필 수 없는 나라다. 그럼에도 우리는 홍대용과 박제가가 살던 그때처럼 편견과 왜곡된 인식으로 중국을 바라보고 있다.

박제가는 4차례나 중국을 다녀왔다. 중국어를 잘한 박제가는 중국의 저명한 학자, 예술가들과 교유했다. 조선시대 중국을 여행한 지식인이 적지 않았지만, 박제가 만큼 많은 수의 중국 명사와 친분을 나눈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박제가의 셋째 아들이 정리해 엮은 <호저집(縞紵集)>이란 책에는 박제가가 사귄 중국 인물이 180여명이나 등장한다. 그가 쌓은 화려한 인맥은 훗날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조선 학자들이 중국 명사들과 교류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박제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을 지새우며 조선을 바꿀 해결책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중국 여행은 조선의 개혁 방안을 구체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29세의 박제가는 1778년 7월1일 북경에서 돌아오고서 경기도 바닷가 고을인 김포 통진에 우거하면서 평소의 가슴 속 생각과 중국 여행에서 보고들은 견문을 정리해 불과 3개월 만에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했다.

박제가는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당해 국토가 유린되고 큰 피해를 본 것에 보복하려는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실현하려면 경제를 살려 부유한 국가가 돼야 하며, 그것이 먼저 이뤄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봤다.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도덕적 이념의 강화만으로는 개인과 나라의 빈곤을 해결할 수 없고, 빈곤이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명분도 허구라고 본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국제정치가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미 중간의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250년 전 조선의 국익을 강조하던 박제가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정성희 실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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