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친일파 윤덕영의 별서 강루정(江樓亭)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앞두고 융희황제의 비 순정효황후는 치마폭에 국새를 숨겼다. 윤덕영(尹德榮.1873-1940)은 조카이자 국모인 황후의 치마폭을 들쳐 국새를 꺼낸다. 이 일로 518년 조선과 대한제국의 문을 닫는다. 이 공로는 그는 자작(子爵)의 작호와 일제의 각종 혜택을 받아 호위호식을 하다가 68세에 생을 마감한다.

그는 한일합병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함으로써 경술국적 8인에다가 이완용과 버금가는 악질 친일파가 된다. 그가 환갑을 앞둔 1932년 5월 구리면 교문리 381번지 일대 3필지 약4만평을 구입해 등용동(登龍洞)이라하고 약 2천3백평 규모의 별서(別墅. 별장)를 짓고는 강루정(江樓亭)이라 편액을 달았다.

그에게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 송석원(松石園) 내 ‘벽수(碧樹)산장’과 충남 공주 갑사 계류에도 별서가 있었으나 서울과 가깝고 조용한 곳을 찾아 만년을 보내고자 했다. 광무 황제의 홍릉터를 잡은 서규석이 이곳을 추천했다. 등룡동은 풍수학적으로 서쪽의 물이 한강으로 흘러가고 용이 오르는 형상으로 감나무가 얼어 죽지 않을 정도의 따스한 곳이며, 그의 일가인 해평(海平) 윤씨가 일찍이 세거한 곳이다.

그의 손자인 (전)삼육대 원예학과 윤평섭 교수가 1960년대부터 서너 차례 이곳을 찾았고, 1986년 “한국정원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을 살펴보면 등용동은 전통양식과 일본·서양식에 시멘트 블록과 타일 등으로 조성한 독특한 정원임을 알 수 있다. 안채(강루정)와 사랑채(갑탁정), 서고와 서당, 6곳의 분수대, 2곳의 못, 4곳의 우물(침강천 포함), 포석정과 비슷한 유배구(流盃溝. 실개천)과 곳곳에 돌다리도 얹었다. 못은 산 중턱에 지름 10m 정도의 반월형 만월담(滿月潭. 서울삼육학원 내 연못)과 십자형으로 꾸민 일중당(一中塘)이 입구에 있었고, 해시계인 일영탑과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溥儀]가 윤덕영에게 내린 ‘윤집궐중(允執厥中)’의 휘호비가 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 있었다. 주변에는 솔밭과 배밭 등 과실수와 정원수로 주변을 둘렀다. 서당은 1930년대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모아 무료로 공부도 시켰고, 1940년 10월 26일 등용동 산자락에 장사도 지냈다.

이 별서의 건물은 해방 후 박흥식이 뜯어갔고, 1971년 그의 묘소이장과 개발로 본 모습은 사라졌다. 이후 구리농원이라는 식당으로 바뀌었고, 회갑연과 야외예식 등의 장소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푸이의 휘호비는 수돗가 빨래판으로 일영대의 받침돌 등 석물은 살림집 복도에 놓여있고, 대문 앞 등용동 입비(立碑)도 살림집 앞으로 이동했다. 안채인 강루정 곁에 있던 침강천은 이태리식당 마당의 정원의 연못이 되었다.

이 별서는 구리시청 바로 옆에 있으나 구리문화원의 일부 연구자와 필자 외에는 무관심이다. 강루정은 대한제국과 청나라 멸망의 당사자인 윤덕영과 힘없이 나라를 내주었던 푸이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폐허에 남아있는 석물이라도 챙겼으면 한다. 역사는 아름다운 것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한철수 시인·구지옛생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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