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오랜 유배 생활을 끝내고 고향 열수(洌水:한강)에 돌아온 지 18년 만인 1836년 음력 2월22일 75세를 일기로 남양주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부인 풍산 홍씨와 혼인한 지 60년 되는 회혼일이기도 했다. 혼인한 날과 세상을 떠난 날은 복사꽃이 피던 봄날이었다.
57세의 나이에 고향에 돌아온 정약용은 미완이었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완성했고 ‘흠흠신서(欽欽新書)’, ‘아언각비(雅言覺非)’, ‘매씨서평(梅氏書平)’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중년 이후 정약용은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백성을 위한 구세적 열정을 잃지 않았다. 또한 자연인으로 돌아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열수(한강)를 중심으로 북한강과 남한강을 여행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발견하려 했다.
정약용은 그의 나이 60세에 “육경사서로 자신을 닦고 일표이서로 국가를 다스리고자 했으니 본말이 구비되었다”고 선언했다. 그에게서 경학연구는 곧 경세 즉 국가 개혁안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아울러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로 대표되는 경세서를 통해 새로운 국가상을 제시했다. 해배 이후 정약용은 신작, 김매순, 홍석주, 이재의 등 경기 한강 주변의 최고 학자들과 학술논쟁을 벌였다. 정약용을 중심으로 이곳 한강변에서 이루어진 ‘19세기 경학논쟁’은 경학을 위한 경학이 아닌 현실 사회에 적용될만한 효용성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해배 후 죽기 전까지 한강변에서 지낸 한 백발노인의 마지막 18년은 울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영혼이 써 내린 제2의 인생 서막이었다. 19세기 전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던 조선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그의 문집 ‘여유당집’과 ‘여유당전서’로 정리돼 오늘날 소중한 유산으로 전승되고 있다. 현실 정치에서 자신의 이념을 실현할 수는 없었지만, 탁고개제(托古改制)의 이념을 저술에 담았다. 고향집 앞을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면서 정약용은 ‘흘러가는 것은 저 물과 같구나!(逝者如斯夫)’라고 한 공자의 심경을 곱씹어 보았지 않았을까.
정성희 실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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