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은 언제 어디를 가도 단아한 기품이 있다. 엄청난 역사와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다. 누구는 비산비야(非山非野)에 속계(俗界)인 듯, 영계(靈界)인 듯하다고 한 바 있다.
광릉(光陵: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 능)은 조선왕릉의 모범으로 꼽히면서도, 조성과정이나 형태에서 다른 능과
비교되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 광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향어로(香御路)가 없는 능이다.
능에 가면 능역이 시작되면서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붉은색의 홍살문(紅箭門)이 나온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박석길이 향어로다. 제를 올릴 때 향과 축문 봉안에 이용하는 향로(香路)와, 왕이 의례를 행할 때 이용하는 어로(御路)를 통틀어 향어로라고 한다. 그러나 광릉에는 현재 향어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설치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후대에 와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훼손이 된 것으로, 학자들의 연구논문에서 밝혀지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일제 강점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둘째는 광릉은 남의 묘(墓)를 이장 시키고 조성한 능이다.
세조가 승하하자 예종(睿宗)은 능지로 여러 곳을 물색했다. 최종적으로 정한 곳이 세조 때 정승까지 지낸 정창손(鄭昌孫)의 아버지 정흠지의 묘 터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가라 할지라도 아버지 묘를 이장 하고, 그곳을 광릉의 능지로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릉 중에서 남의 묘 터에 조성된 능은 여러 곳이 있다. 당시를 전후해 서오릉 내 경릉(敬陵:덕종, 소혜왕후)이 정역(鄭易: 조선초기 문신)의 묘 터에 조성됐다. 이때는 세자 묘(의경세자: 세조의 아들이며 성종의 아버지, 성종때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이 됨)로 조성됐다. 또 광주에 있던 영릉(英陵: 세종, 소헌왕후)도 여주 이계전(李季甸: 세종때 대제학)의 묘 터로 천장(遷葬)했다. 왕의 초장지로서는 광릉이 처음이다.
셋째는 광릉은 조선왕릉 최초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형식의 능이다.
동원이강릉이란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을 중심으로 다른 줄기의 언덕에 단릉(單陵: 한 사람만 묻혀있는 독립적 능)처럼 안장한 능을 말한다. 이전까지의 능 조성 형식은 단릉 이거나 쌍릉 형식이었는데, 처음으로 전혀 다른 방식의 조성형태를 취한 능이다.
올해로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지도 13년이 됐다. 광릉의 향어로가 훼손됐다는 것은 이미 연구 논문이나 광릉지(光陵誌) 등 다른 역사적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너무 오랜 기간 방치됐다고 생각 된다. 관람객의 궁금증 해소를 위해 안내문 설치와 함께, 조속히 고증을 거쳐 광릉이 본래의 모습대로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황용선 前 파주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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