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정치인과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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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상 수원시민햇빛발전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자존심, 자존감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사실 이 의미는, 우리가 세상살이, 생존경쟁이 예전보다 더 팍팍하고 심해졌다고 느끼는 어느 시점부터인가 많이 퇴색한 것 같다. 남을 배려하기는커녕 나 자신도 지키며 살기도 힘들지만, ‘스스로’ 보다는 ‘남에게 보이기’로 점점 기울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개인’도 잘 팔려야 먹고사는 문제라도 겨우 해결할 수 있으니 그런 경향이 더 강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알량한 자존심’, ‘자존심이 밥 먹여 주냐!’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것 같다. 자존심, 정말 알량하기만 하고, 실질 생활과 상관없는 문제일까? 먹고 사는데 전혀 득될 것이 없을까?

2016년 4월,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얼마 남겨 놓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회사가 명예퇴직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직원에게 동료들과 멀리 떨어진 한쪽 벽면 사물함을 바라보도록 자리를 배치해서, 일명 ‘면벽수행’ 대기발령 조치를 해서 여론의 지탄을 크게 받았던 적이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강제된 시간표까지,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당시, 이 직원이 두 달 만에 구제 신청을 냈는데 지방노동위원회는 ‘회사의 조치가 부당하지 않았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법은 아니 법 기술자들은 대체로 노동을 사용한 쪽의 편에 서 있었다. 당시에는 사회적 눈치도 보지 않고, 그런 경향이 더 노골적이었던 것 같다.

누가 봐도 치졸하고 비인간적인 회사의 조치에 보통이라면 며칠 만에 백기를 들고 마는 압박감을 이 사람은 어떻게 견뎠을까. “아이들이 아직 고등학생...” 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삶의 이런저런 조건들과 섞여 있을 때 자존심은 한낱 알량한 어떤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마지막 조건일 때는 생의 모든 것이 된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마지막 자존심으로 모욕을 견뎠다면. 그래서 그가 인내의 과정에 버렸을 무언가도 알량할 수 만은 없다. 생활을 위해 지키는 것도, 버리는 것도 모두 자존심이다.

그렇다면 정치인의 자존심은 무엇이어야 할까? 내 가족만을 무조건 우선시하지 않는다면,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그것과 많이 닮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익숙해진 가족들이 자기를 좀 몰라줘도 묵묵히 뒷바라지하는 것처럼. 내 능력만큼 일해 번 것이라도 혼자만 갖지 않는 것처럼. 베풀지만 조건을 달지 않는 것처럼. 내 편 안 든다고 차별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 다투고 나서 돌아서 마음 아파하는 것처럼. 실패 앞에서 당사자보다 더 아파하는 것처럼. 그 고통이 나에게 옮겨 오길 바라는 것처럼. 가족 누군가의 죽음에 무너져 내리는 몸처럼. 생활 최전선의 몸부림들을 보듬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윤은상 수원시민햇빛발전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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