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장애인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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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진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 아니면 차라리 오늘이라도 나와 함께 데려가 주세요.”

장애 자녀를 둔 어느 엄마의 기도이다. 뼈에 사무치도록 간절하게 울부짖는 엄마의 이 기도를 누가 이해하겠는가,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아프면 이렇게 기도한단 말인가?

엄마의 이 기도는 절절한 모성애가 얼마나 귀하며 크고 위대한지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황량한 광야처럼 각박하고 삭막한 우리네 세상이 얼마나 매정하고 냉랭한지 여지없이 보여준다.

사람 사는 세상이 이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헤아린다면, 장애인을 배려하는 따뜻한 사랑과 온정의 손길이 털 끝 만큼이라도 있다면 이 엄마가 이처럼 애타게 속 태우며 눈물 짓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우리가 발 붙이고 사는 이 땅에 뾰족탑 십자가의 성당과 예배당, 고풍스럽고 우아하며 고즈넉한 사찰들이 이렇게도 많은데 왜 이렇게 매정하고 메마른 세상이 됐단 말인가.

물론 장애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창조주의 섭리와 깊은 뜻이 있으리라 믿는다. 이미 그것은 역사를 통해 증명됐다. 조금 불편할 뿐 인생을 장애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승리의 표상처럼 역사에 빛나는 사람이 된 이들이 많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가죽공예점에서 송곳으로 자기 눈을 찔러 실명한 세 살 루이 브레이유는 ‘내 아이의 인생이 끝났다’고 낙망하던 아버지의 생각을 넘어 점자법을 개발해 수많은 시각장애인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희망이 됐다.

4선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소아마비 장애인이었고, 노벨상 수상자인 가가와 도요히코는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폐결핵으로 평생을 살았다.

누가 감히 이들을 장애인이라고 비난하겠는가. 신체나 정신의 한 부분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인생까지 실패하거나 포기하라는 법은 없다. 어느 누가 감히 장애인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는가.

어떤 면에서 우리는 장애인을 대하는 일에 장애를 갖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언제 장애를 갖게 될지 모르는 예비 장애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외면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을 내 몸과 같이 여기며 보듬어줄 수 있길 바란다. 안타까운 마음에 숨죽이고 살아가는 장애인 부모나 가족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어루만져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싶다.

고명진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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