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기후변화에 대처한 조상들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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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실학박물관장

오늘날 ‘인류세’라 명명할 정도로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위기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역사적인 파리기후협약 이후 지구 온도 상승을 막기 위해 탄소 중립 등 다각도의 노력을 전 세계가 기울이고 있다.

물론, 지금의 기후위기는 지구가 아닌, 지구위에 사는 인간이 초래한 것이지만, 역사상 기후위기는 비단 현대사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는 흔히 소빙기라 불리는 기후변화로 가뭄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그에 따른 흉년으로 조선 숙종 대에는 ‘을병대기근’이라 하여 전 인구의 20%인 150만명이 굶어 죽는 일도 있었다. 전근대사회에서 가뭄을 극복하려는 대표적인 노력이 기우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우제 기록을 보면, 기우제를 가장 많이 설행한 왕이 세종이었다. 세종은 총 136회의 기우제를 지냈고, 그 다음이 숙종으로 115회, 영조가 101회로 그 뒤를 잇고 있다.

가뭄과 기우제 횟수를 등치할 수는 없겠지만, 이 시기에 기근이 많이 발생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기우제는 자연과 하늘을 감동시켜 가뭄을 타개하고자 한 일종의 제의(祭儀)이지만, 우리 선조들은 한편으로 균역(均役)이나 준천(濬川) 등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역사상 뛰어난 과학적 성과들이 가뭄이 극심했던 세종과 숙종, 영조 대에 이뤄졌다. 세종대에 측우기가 발명되어 벼농사를 위한 과학적이고도 효과적인 강수량이 측정되기 시작한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조선은 15세기 중반에 세계 최초로 궁궐뿐만 아니라 전국 8도의 감영과 군현에 이르기까지 350소에 이르는 우량관측망을 구축한 나라였다.

기상관측기기로서 세계기상기구(WM O)가 허용한 오차는 1% 이내 인데 측우기는 0.51%를 충족한다고 하니, 그 정확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숙종은 대동법을 전국단위로 확대 실시했고, 시헌역법 등 서양천문학에 맞춰 세종 못지않은 천문학 발전을 이뤘다. 영조는 임란 이후 붕괴된 측우기 제도를 복원해 경기감영을 비롯한 팔도감영에 측우기를 설치하고 비가 올 때마다 8도의 관찰사가 강수량을 중앙정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측우기를 활용한 우량 관측 기록은 조선통감부에 의한 근대적 기상관측이 도입된 1907년까지 이어졌다. 조선후기 기후변화는 실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소빙기를 겪은 실학자들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태관을 제시하기도 했다. 성호 이익과 담헌 홍대용은 자연이 인간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고 인식했고, 연암 박지원은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고 상생해야한다고 보았다. 다산 정약용은 인간과 자연은 조화와 화해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자연은 인간이 소모하는 대상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관계라는 실학적 생태관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귀 기울이고 배워야할 자세가 아닌가 싶다.

정성희 실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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