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맞서던 우리네 엄마 생명을 초월하던 자식 보호 10살 아이 비극, 어찌 할까
아들이 국민학생이었다.
마을엔 어쩌다 아이스케끼 장수가 왔다. 큼직한 짐 자전거에 나무 궤짝을 얹었다. 궤짝 안에 노란 비닐 주머니가 있었다. 얼음을 채운 나름 냉동 장치였다. 그때는 쉽게 못 사 먹을 사치품이었다. 모처럼 그걸 사주고 싶으셨나보다. ‘부엌에 아이스케끼 사놨어.’ 한달음에 부엌으로 달려갔다. 양은 그릇 두 개가 포개져 있었다. 그러나 아이스케끼는 없었다. 노란 설탕물에 막대기만 꽃혀 있었다. 아들은 엄마에 ‘다 녹았잖아’라며 성질을 냈다. 엄마가 ‘미안하다’고 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었다.
‘수원’에서 학교를 다녔다. 엄마는 농사를 지으며 ‘동막골’에 계셨다. 그 시골 집에 기타가 있었다. 어쩌다 가면 하루 종일 뚱땅거렸다. 엄마가 그게 걸렸던 모양이다. 어느 날 쉽지 않은 결행을 했다. 기타를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섰다. 동네 버스로 ‘머내’까지, 시외 버스로 ‘매향동’까지, 걸어서 ‘지동’까지 오셨다. 누런 한복 차림이었다. 양 손에는 짐도 있었다. 젊은이들이 놀렸다. ‘아줌마, 치면서 가세요.’ 아들은 ‘창피하잖아’라며 화를 냈다.’ 엄마가 또 ‘미안하다’고 했다.
아들이 이등병이었다.
권사이신 엄마의 신앙은 독실했다. 담배는 스무살 아들에도 용서 안됐다. 그 아들이 군대 갔고 첫 면회날이 왔다. 기억도 안 나는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 오셨다. 정신 없이 먹고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섰다. 엄마가 고쟁이 속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누나에게 줬다. 따라온 누나가 슬쩍 건넸다. 빨간색 ‘솔’ 담배였다. 아들이 담배 피우고 싶어 할 거라면서 수원에서부터 사 오셨단다. 아들은 ‘여기도 담배 나옵니다’며 타박을 했다. 엄마가 또 ‘미안하다’고 했다.
아들이 서른을 넘겼다.
차 할부금이 밀렸다. 해결할 길이 없었다. 누나가 빌려줬다. 꼭 갚겠다고 했는데 누나가 말했다. “그 돈 니꺼야. 갚을 필요 없어.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너 큰 돈 필요할 때 주라고 맡기고 가신거야.” ‘아들이 돈을 펑펑 쓰니까 꼭 나중에 주라’는 당부까지 하셨단다. 마지막 몇 년은 치매로 정신을 놓으셨다. 아마 ‘정신이 있던 어느 날’ 맡기셨던 모양이다. 백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이다. 이제 아들도 어른이었다. 감사인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없었다.
그게 우리 시대 엄마다.
떠나 보낸지 30년쯤 됐다. 엄마 얼굴은 이제 기억에도 없다. 사진 속 모습은 그 얼굴이 아니다. 따뜻함이 표현 안된 그림일 뿐이다. 대신 뭔지 모를 냄새가 가끔씩 온다. 때 묻은 옷 속에서, 검게 그을은 손 끝에서 풍겨 나던 땀 냄새, ‘가난의 냄새’다. 아이스케끼 사주기도 버거웠던 가난의 냄새다. 그래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아들, 그리고 자식은 그 시절 엄마들이 버티는 이유였다. 온 인생이 자식을 가난에서 떼어 놓으려는 투쟁이었다.
참혹함에 할 말이 없다.
체험학습 간다며 설레였을 아이다. 그 아이가 엄마에게 업혀 나온다. 등 뒤로 축 늘어진 아이의 팔이 보인다. 모두가 짐작했지만 애써 말 안했다. 언론도 ‘섬 밖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썼다. 일부러 잘못 쓴 오보였다. 그 오보의 희망이 무너졌다. 바닷속 차 안에서 아이가 발견됐다. 아빠가 빚이 많았다고 한다. 생활고의 흔적도 확인됐다. 그래서 그랬단다.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의 선택이었을 리도 없다. 한줌의 재가 된 1일, 거기 아무도 없었단다.
형사정책연구원 자료다.
가족을 살해한 뒤 자살을 택한 범죄 통계다. 2000년부터 2019년까지 20년치다. 무려 426건이다. 자녀가 피해자가 된 경우도 247건이다. 절반을 넘는다. ‘부모·자녀 동반자살’로 불리는 ‘자녀 살해 후 극단선택’도 있다. 이건 통계로도 남지 않았다. 이 참담한 세상에 무슨 결론을 말하겠나. 이런 데 붙일 인간의 언어는 없다.
主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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