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량·행정업무 이미 포화 상태인데 돌봄·보육 영역까지 요구해 시시비비 민원은 협력 관계 멀어질 뿐...사회계층 관계없이 어울리는 ‘공공재’ 개인 이익·사적 욕망 창구 지양해야 서로 입장차 인정하고 이해하는 태도 ‘공동체’ 학교 교육 일궈 나갈 수 있어
학교 교육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부모들로부터 학교의 폐쇄성에 대한 답답함을 듣곤 한다.미흡한 정보공개, 충분치 않은 교육활동, 적극적 반영 없는 민원 처리 등 학부모가 학교에서 교육활동을 같이 할 수 있는 문턱과 공간이 너무 좁다는 이야기들이다. 학교 교육 참여를 원하는 학부모들을 교문 앞에서 멈추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학교를 망가뜨리는 민원이라는 공포
학부모와 학교 교육의 연결 지점은 크게 2가지이다.
첫 번째는 자녀에 대한 생활 지도의 문제, 두번째는 교수학습(수업)에 관한 것이다. 내 자녀의 학교 생활 문제를 상담이라는 ‘교육적’ 접근이 아닌 시시비비를 가리는 ‘민원’으로 해결하려는 경우가 있다.
수업 종 이후 교실에 안 들어오는 학생의 등을 선생님이 손을 대었다면 때린 것인가 단순히 민 것인가? 잘못을 지도하는 교사의 말들이 인격을 모독한 것인가, 훈육 이었나? 이런 갈등이 관계, 대화, 공동체를 중시하는 ‘교육적, 회복적’ 지도로 해결되지 않고 ‘처벌적, 응보적’ 갈등으로 크게 비화되곤 한다.
교육행태를 학교와 교육청의 각종 위원회에서, 혹은 법원에서 무게를 달고 비교를 해 처벌 내리게 되는 것이다. 교사와 학부모(학생)의 ‘교육적’ 관계가 이처럼 ‘민원화’되는 현상이 과거엔 신문보도의 일부로 장식됐었다.
그러나 요즘은 교육청 단위마다 매년 1~2건씩 크게 사건화되기도 한다. 극심한 고통을 겪은 교사가 퇴직했다는 소문까지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악성 민원이 점점 우리 학교로, 혹은 옆반 선생님으로 가까이 오게 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교사들에게 학부모와의 돌발적 관계는 교직생활을 위협하는 신호로 여겨진다.
이 같은 경험들이 축적돼 일상적 공포로 다가온다. 교사는 본능적으로 관계 맺기를 멀리하게 돼 학부모와의 협력적 관계까지 멀어지게 만든다.
■ 넘쳐나는 교육활동, 부모의 역할까지 요구되는 교사
두번째로 교수학습(수업)에 대한 민원이 있다. 학부모 입장에서 수업은 너무나 쉽고 간단한 지식 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 널려진 수 만가지 교육적 활동들을 학교가 등한시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교사가 교육해야 할 내용은 과거와 달리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교육과정 재구성과 진로, 자치 활성화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 수많은 교육 사업 등 이전과 다른 업무들이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계속 더해지고 있다.
학교의 수업량과 행정업무는 학부모의 학생 시절에 비해 2배는 족히 늘어나 있다.
최근엔 본연의 ‘교육’ 말고 ‘돌봄’과 ‘보육’의 영역까지 학교에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한 교실에 60-70명이 있어도 끄떡없던 과거와 달리 인성과 생활지도의 부담은 거의 수업의 무게를 넘고도 남을 만큼 증가했다. 갈수록 학교에 요구되는 것은 많아지고 학교의 역할은 이미 포화 상태다. 이로 인해 학부모 참여에 대한 외부의 기대와는 달리 실제 학교로 학부모가 들어올 수 있는 교육 영역은 좁아질 수 있다. 이미 외부로부터 업무 포화 상태인 교사에게 학부모의 참여는 민원 갈등의 부담과 공포가 내 교실로 들어오는 것이자 교육해야 할 또 다른 교과가 생기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교육3주체의 당위론으로 교육 활동에 학부모가 참여해야 한다는 제도적 압박은 학교와 교사에게 여간 부담이 아니다.
제도의 변화는 학부모의 교육 참여가 ‘민원’의 해결 수단이 아닌 ‘교육적’ 참여가 될 수 있는 문화의 변화와 함께 가야 한다.
■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를 위한 협력자가 돼야
먼저 교육은 ‘공공재’라는 합의가 우선 돼야 한다. 사사로운 이익과 사적 욕망의 창구로서 3주체의 활동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학부모 및 교사가 함께, 다양한 성향의 학생들을 아우르며 성장을 도모하는 공동체임을 잊어선 안된다.
모든 학부모에게 내 아이의 이익과 행복은 우선 시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동체 문화에선 ‘수업을 방해하는 아무개를 전학 보내라’ 식의 사사로운 민원성 전화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학교는 성별, 사회 계층, 신체적 결함과 관계없이 어울리는 공동의 장소가 되도록 ‘교육적 판단’을 우선해야 한다. 학부모에게 공동체적 협력자가 될 수 있는 교육이 정기적, 상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교육엔 교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 교육의 맥락을 볼 수 있는 학부모의 교육 참여가 되어야
학교는 많은 양의 정보를 홈페이지와 정보공시, 학교운영위라는 제도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양의 종이와 게시물로 학교를 들여다 보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문서에 담지 못해 글자로 정량화 할 수 없는 교사와 학생의 피드백(교수-학습), 상담, 행정업무 등이 산더미처럼 존재한다.
교실의 교육을 제대로 보기 위한 학부모의 다양한 참여 방법이 기획돼야 한다. 그래야 왜 학교는 힘들어하는지, 무엇 때문에 교실 교육 너머 지역사회로까지 나가기 어려워 하는지, 오지 수업에서 알 수 있는 학생들의 언어와 행동양상은 무엇인지, 교사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비인지적 정서적 측면의 이해와 대응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학교 교육의 속살까지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생업으로서 교육하는 교사와 달리 부가적으로 학교 교육에 참여하는 학부모는 역할과 책임의 크기가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 다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이들 한계를 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차이를 서로 인정하고 먼저 이해하는 태도가 전제돼야 ‘공동체’로서 학교 교육을 일궈나갈 수 있다.
공정욱 부천 원종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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