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1762년 음력 6월 16일생으로 지난 7월 14일은 다산 탄신 260주년 생일이었다. 다산이 태어난 1762년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이른바 임오화변이 일어난 해이다. 임오화변이 음력 5월 13일이었으니, 사도세자가 죽고 대략 한 달 뒤 쯤에 다산이 태어났다. 남인계 시파(時派)였던 부친 정재원은 사도세자가 죽자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집이 있는 마현으로 낙향하였다. 이 때문에 다산은 서울이 아닌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이 현재 다산 생가 여유당이 있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다산은 18년간 유배지인 강진에 있었고, 해배 이후 죽기 전까지 18년을 고향인 한강가에서 살았다. 18년 유배기간 동안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한 다산은 기나긴 유배에서 풀려나자 해배의 기쁨보다는 “죽음에서 돌아오니 망연하구나”라는 적막한 심경을 토로했다. 중년 이후 정약용은 개인적 불행에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만년에 이르도록 구세적 열정을 잃지 않았다. 비록 현실 정치에서 자신의 이념을 실현할 수는 없었지만, 탁고개제의 이념을 저술에 오롯이 담아낸 것이다. 19세기 정약용의 고향 한강은 당대 최고의 경학논쟁이 이루어진 문화공간이었다. 자신의 경학 연구를 신작이나 김매순 등 한강 주변의 학자들과 교환하였고 이 과정에서 정치적 성향 즉 당론을 뛰어넘은 우정을 나누었다. 이와 함께 정약용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대표되는 당대 현실에 대한 개혁의 열망을 담은 경세서를 완성하며 새로운 국가상을 제시하였다.
1818년 해배 이후 정약용은 강진에서 집필한 저술을 고향집인 여유당에서 정리했고 환갑을 전후하여 일생의 염원이었던 북한강을 따라 여행하면서 새로운 조선을 발견하려 했다. 해배 2년 뒤인 59세에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 춘천 일대를 유람한 후, 3년 뒤인 1823년에도 마재 앞에서 배를 띄워 춘천에 와서 소양정에 오르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돌아보았다. 한번은 조카의 혼사, 다른 한번은 손자의 혼사에 동행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물위에 떠다니며 살림하는 집이란 뜻인 ‘부가범택(浮家汎宅)’의 꿈, 즉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꿈을 일시나마 실현한 것이었다. 한강가의 늙은이라는 의미의 열수옹이라 자처했던 정약용의 18년 여생은 세상에 대한 울분과 좌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써내려간 인생 2막이었다.
정성희 실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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