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능력주의 말고 놀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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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희 인권교육온다 활동가

무더웠던 지난 여름 한 고등학교에서 인권교육을 진행했다. 학생들에게 인권교육에 온 이유를 적어달라고 하자 ‘생기부(생활기록부)기재’라 적힌 숫자가 종종 눈에 밟혔다. 황금 같은 주말에 그들을 나오게 한 힘은 대학 진학 준비에 필요한 ‘생기부 기재’인 셈이다. 토요일마저 학교를 나와야 하는 학생들과 ‘인권’을 이야기해야 하는 우리 사이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공유하며 동료 활동가와 쓴웃음을 지었다.

교육을 시작하며 한 학생에게 이후 시간에 어떤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워낙 피곤해 보이던 터라 내심 집에서 잘 거란 대답을 짐작했으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학원가요.”

힘없이 대답한 고등학생의 표정이 작년 가을 교육에서 만난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얼굴과 겹쳤다. 의사가 꿈인 어린이는 학원을 마치면 밤 9시가 되야 집에 들어온다고 했다.

“서울대 의대 가려면 엄마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했어요.”

에너지 음료 광고에 나올 법한 두 학생의 얼굴에 ‘번아웃’과 부지런한 삶을 말하는 MZ 세대의 신조어 ‘갓생’이라는 단어가 처연하게 떠올랐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9화는 이상한 남자 ’방구뽕‘이 등장한다. 그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학원 아이들을 납치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선다.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은 10시까지 ‘자물쇠반’에 갇혀 공부하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컵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한다. 자신을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이라 부르는 방구뽕은 자유를 빼앗긴 아이들의 ‘놀권리’를 위해 놀이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변진경의 책 『울고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면』은 드라마 속 아이들의 이야기를 조사와 인터뷰를 수반한 현실로 조명한다. 수 년간 아동의 문제를 취재해 온 변진경 기자는 10시 반이면 우르르 학원에서 나와 패스트푸드점 폐장 시간까지 입속의 음식을 욱여넣는 아이들, 학원 수업을 위해 저녁을 거르고 고카페인을 끊지 못해 위염을 앓는 아동의 삶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담았다.

드라마와 책 속의 아동은 교육 현장에도 존재한다. 9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는 초등학생과 주말에도 학원을 가야 하는 고등학생. 공부와 학원에 내몰린 아이들에게 현실은 <오징어 게임>에서 456억 원의 상금에 목숨을 걸고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상생과 연대를 배우기 전에 이기는 게임을 터득한다.

노력에 따른 좋은 결과가 나타날 거란 믿음이 공고화될수록 사람들은 현실의 결과를 자기 탓으로 돌린다. 각자도생은 타인을 경쟁자로 의식하고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결승점을 향해 아등바등 달려가게 하는 기본값이 되었다. 능력주의를 통과한 성공은 위계를 형성한다. 스스로 채찍질하며 노력해서 얻어낸 성취는 시험 외에 다른 길은 허락하지 않는다. 어른이 된 이들은 만들어진 불안함으로 그들의 자녀를 ’자물쇠반‘이 있는 학원으로 보낸다.

흙수저, 금수저와 같은 불평등을 감수하고서라도 경쟁에 몰두하는 사회 속에 타인을 위한 환경은 그다지 넉넉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간파한 『공정이후의 세계』저자 김정희원은 나의 안위만을 위한 돌봄이 아닌 사회의 부조리와 불공정을 감싸는 구조를 직시하기 위해 타인과 연대하고 나를 돌보는 ‘급진적 돌봄’을 제안한다. ‘급진적 돌봄’은 자신과 더불어 타인을 돌보는 삶이다. 경쟁과 성공을 부추기기 위한 정책은 어떤 이유로도 아동의 쉴 권리와 놀 권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만 잘 먹고 잘사는 삶은 좋은 삶이라 할 수 없다. 연대와 상생이 인식의 고갱이 되어 좋은 삶으로 이끄는 실천이 필요하다. 어린이가 스스로 돌보며 상생을 배울 힘은 놀이 속에서 이루어진다. 보호와 통제가 만연한 사회에서 어린이가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는 삶의 여건을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보호자는 어린이에게 주체적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환경이 돼야 한다. 각박한 세상을 거스르기 위해 어른도 노동의 수단이 아닌 자기돌봄의 주체로 자기 삶의 속도를 따라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하늘도 보고 친구의 얼굴을 보며 마음껏 놀고 충분한 쉼이 필요한 존재에 예외는 없다.

정서희 인권교육온다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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