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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9. 일제의 야만성 폭로된 ‘제암리학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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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독립운동단체를 조명하다] 9. 일제의 야만성 폭로된 ‘제암리학살사건’

총칼로 자행된 ‘한국판 제노사이드’... 日 민낯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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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세워진 3·1운동순국기념탑

■ 한국판 제노사이드의 상징이 되다

제노사이드(genocide)는 집단살해나 대량학살을 뜻한다. 원래 ‘인종’, ‘민족’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genos’와 ‘살해’를 뜻하는 라틴어 ‘cide’에서 유래했다. 우리의 근대사에서는 일본군 갑오농민군과 의병운동 대학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승전에 대한 보복인 관동군의 경신대참변, 간토대지진 당시 야만적인 1923년 제노사이드 등이 대표적이다. 3·1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무수한 만행이 자행됐다. 제암리학살사건은 1919년 4월15일 화성지역에 일어났다. 3·1운동 당시 일제 군인이나 경찰은 평화적인 시위에 총칼을 앞세워 끔찍하게 탄압했다. 화성시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일대에서 집단학살은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배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세계인들의 공분을 자아낸 충격적인 사건을 일본은 반성하기는커녕 인정조차도 하지 않는다.

■ 생존권 확보 위한 무력항쟁으로 맞서다

화성의 종교계 인사나 유지 등은 서울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후 주민들에게 소식을 널리 알렸다. 마침내 3월21일 오산리 주민들은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을 올렸다.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평화적인 만세운동은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환하는 분위기였다. 거사일은 군중을 자연스럽게 동원하는 장날을 이용했다.

1천여명이나 모인 송산면민들은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했다. 시위대를 향해 해산을 종용하던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는 총을 발포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시위군중은 일본순사를 죽이라고 외쳤다. 기세에 억압당한 노구치는 자건거를 타고 남양만 방향으로 도망치다가 돌에 맞아 쓰러졌다. 군중들은 몰려가 돌과 곤봉으로 처단했다. 3월31일 정오에 발안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제암리교회 김교철 전도사와 홍원식 교인 등과 공동으로 준비했다. 연대를 통한 시위는 조직적으로 주민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장날을 맞아 이정근은 군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했다. 당황한 일제 경찰의 위협 사격과 시위군중의 투석전으로 이어져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시위대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인근 일본인 가옥과 소학교에도 불을 질렀다.

일본군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만세운동을 이끌던 이정근이 현장에서 칼에 맞아 사망한 가운데 부상자가 속출했다.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흥분한 시위군중은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파괴했다. 정미업자 사사카(佐佐坂) 등을 비롯해 일본인들은 재빨리 피신했다. 4월1일 발안장 주변 산위에 봉화가 올려지는 등 분위기는 더욱 확산돼 나갔다. 4월3일 수촌리 이장 백낙렬, 수촌 제암리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이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 2천여명은 각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 단숨에 불태웠다. 저지하던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도 처단하는 등 극도로 긴장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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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학살사건 현장 모습

■ 학살만행으로 공포 분위기를 만들다

일제는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 수원과 안성 지역에 대한 ‘특별검거반’을 편성, 2차에 걸쳐 파견했다. 말이 검거반이지 실상은 악의적인 비방과 악랄한 방화·살육에 있었다. 4월14일까지 64개 마을에 대한 무자비한 검거로 약 800명이나 체포됐다. 검거 과정에서 사상자 19명이 발생하고 17개소에서 278호가 불태워졌다. 발안 장터와 고주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제암리 사람들에 대한 진압은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4월13일 79연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와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했다. 외형상 임무는 토벌 작전이 끝난 이곳 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위한 치안 유지였다. 그때까지 발안 시위를 주도한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고 피신 중이었다. 특히 이곳은 ‘두렁바위’로 순흥 안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천도교와 기독교의 선교활동으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초토화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운명의 그날 4월15일. 아리타는 부하를 인솔하고 우정면 화산리를 향해 떠났다. 이때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과 정미소 주인 사사카의 안내를 받았다. 이들은 김연방과 친척 김태현을 살해한 후 가옥을 불태웠다. 이어 오후 2시에 제암리에 도착했다. 아리타는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와중에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라고 주민들을 속였다. 15세 이상 남자들은 제암리교회 안에 모이게 한 뒤 교회 출입구와 창문을 봉쇄하고 불을 질렀다.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총에 맞아 사망하거나 불에 타서 사망했다.

주변에는 시신이 타는 냄새와 참상으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방화로 30여채 가옥이 불타 마을은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광경이었다. 저들은 곧바로 팔탄면 고주리로 가서 시위의 주모자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6명을 학살하고 불태웠다.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 외국인들이 참상을 만천하에 알리다

현장을 목격한 정한경은 ‘한국의 사정’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알렸다. ‘29명의 남자들은 종이로 된 창문 틈으로 군인들이 교회를 완전히 포위하고 불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대부분이 죽거나 심하게 다쳤을 때에도 군인들은 계속 불을 붙였다. 탈출을 기도한 사람은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교회 밖에는 처참하게 죽은 시신이 6구나 흩어져 있었다.’ 우정면·장안면의 만세운동으로 인한 수촌리교회와 마을 피해 참상 소식을 듣고 스코필드(석호필)는 4월18일 현장을 찾았다. 제암리 마을의 참상을 보고 국제사회에 알렸다.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은 국제사회에 일제 만행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이후 선교사 노블과 영국 대리영사, 케이블 선교사 등도 이곳을 찾아 학살만행의 실상을 파악하는 동시에 주민들 구호사업에 앞장섰다. 아직도 희생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더욱이 일제는 당시에도 이를 축소하는 등 국제적인 비난을 모면하기에 급급했다.

■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역사현장으로 거듭나기를

정부는 1982년 9월 대대적인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한 뒤 발굴된 유해를 23위의 묘로 안장했다. 이듬해 7월에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과 기념탑이 건립됐다. 제암리학살사건으로 순국한 분들과 함께 이들 부부에 대한 애틋한 인생항로가 하루빨리 복원되기를 바란다. ‘화성시 만세길’에 얽힌 사연은 역사적인 아픈 기억으로 다가온다.

1982년 8월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은 그날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한다.

“마을에서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꽃이 밤하늘을 밝혔으며 곡식 타는 냄새, 시체 타는 냄새가 밤새 바람에 실려 왔고 서까래가 내려앉고 기둥이 쿵쿵 넘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계신 남편과 다시 만날 때까지 몸서리치는 그날의 악몽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요즘도 채소를 갈기 위해 마당 모퉁이를 뒤엎다 보면 그날 검게 탄 쌀알이 나온다.”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평화와 자유를 위한 전당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글=김형목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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