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공간은 달라도 인간 행동은 비슷하다. 조선시대에도 지금과 비슷한 부동산 문제가 존재했다. 속설에 조선 중종 이후 부동산 가격이 500년간 잡히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이유는 있다. 조선 개국년인 1392년 조선의 인구는 554만9천명 정도였다. 42년 뒤 세종 22년(1440년)에도 672만4천명으로 크게 인구가 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 이후 큰 전쟁이 없고 농업생산이 증가해 80여년 뒤인 중종 14년(1519년)에는 1천46만9천명까지 늘어났다. 인구가 급증하니 한양 집값이 폭등한다. 관리가 한양에 있다가 지방 발령이 나면 가족들은 남겨두고 본인만 발령지로 가서 조정에서 제공하는 관가 혹은 친척집에 기거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이 녹봉 상승률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집을 팔고 사대문을 벗어나면 다시 사대문 안에 집을 사기가 어려웠다. 임대료도 올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집세(가대세)를 감하는 정책을 썼던 기록이 꽤 많다. 영조 17년(1741년) 실록에는 ‘어의동 본궁 담장 밖에 사는 군병들이 집단으로 비변사에 집세를 감해줄 것을 요청하는 소지를 바쳤다’는 문구가 나온다. 한양으로 돌아온 관리 혹은 발령받은 관리들이 세를 들었는데 그 집세가 비싸 조정에 하소연했다는 기록이다. 현재의 전월세 상한제와 임대차 의무기간과 유사하다. 조선 중기에는 정부의 신도시 건설과 매입 임대정책이 있었다. 정부가 땅을 사들여 집이 필요한 이에게 분양(임대)을 했다. 빈집을 적극적으로 활용, 큰 집은 3∼5가구 몫으로 분할해 임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피나는 정부의 노력에도 주택가격과 투기는 잡히지 않았다. '주택가격이 폭등해왔다’는 말은 ‘조선시대 중종 이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500년간 실패해 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돈 있는 사대부들이 시세 차익을 노리고 하급관리와 중인의 집을 여러 채 사들여 무주택자들의 주거난을 부추겼다. 주택 구매를 막으려 양반은 양반끼리, 중인은 중인끼리만 주택 거래를 허용했다. 1가구 1주택 정책을 시행했다. 양반들은 다수의 구입한 집을 중인들에게 임대했다는 임대차계약서 위조까지 해서 규제의 칼날을 피했다. 정부가 세입자 현황을 전수조사하자, 양반들은 집의 노비를 중인의 신분으로 면천하여 계약서 위조까지 했다. 대규모 공급 촉진을 위해 산 아래 토지를 개간해서 분할 분양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도성 인근 집값의 양극화가 나타났다. 최고의 거주지인 인사동의 집값은 정9품 관료 녹봉의 50년 치였으나 새로 개발 지역 집값은 녹봉 2년 치밖에 안되었다. 집 위치로 출신을 가늠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남산골 선비’라는 명칭으로 비아냥거리는 사회 풍조까지 발생한다. 가장 부촌인 청진동과 공평동, 인사동은 한양 다른 지역보다 3~4배 비쌌다. 정부가 규제를 해도 잡히지 않는 부동산가격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지금도 부동산 규제와 완화를 반복하는 것보다 크고 느리지만 선제적인 거시적 금리, 성장률, 지역균형발전 등으로 조절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황수 건국대 부동산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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