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태동, 한국이민사 120주년] 고국의 그리움·열망, 독립운동 마중물로

땡볕에 10시간 이상 중노동 기본... 턱없는 임금에도 악착같이 버텨
미국 대륙 이민자의 뿌리로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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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서 생활하는 이민자들이 에바농장에서 한인 공동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특별전 ‘그날의 물결, 제물포로 돌아오다’ 제공

②한인노동자의 고통

인천 제물포를 떠나 하와이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이들은 고된 노동을 견디면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을 이어갔고, 이는 이후 미주 한인사회 독립운동의 마중물로 작용했다.

26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하와이 첫 이민자들은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13일 새벽에 호놀룰루 항에 발을 디딘다. 이민자 102명은 항구의 검역과 입국절차를 마치고 협궤열차에 탑승해 오아후 섬 와이알루아농장 모쿨레이아에서 본격적인 이민 생활을 시작한다.

일본에 의해 하와이 이민 금지 조치가 내려진 1905년 전까지 대한제국 땅에서 하와이로 향한 이민자 수만 7천500여명에 달한다.

이민자들은 1일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들은 매일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뜨거운 햇볕 아래 일했고, 잠시 쉴 수 있는 점심시간은 고작 30분이 전부다.

특히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같은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해야 했다. 이들 중에는 노동자들의 근무를 감시하는 ‘루나’도 존재했다. 이민자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 사탕수수 농장 주변의 잡초를 뽑고, 줄기를 자르고, 이파리를 잘라내 차곡차곡 쌓아 물을 대는 일을 했다.

하지만 고된 노동에 비해 급여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민자들이 1개월 동안 일을 마치면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던 ‘방고’에 따라 현금으로 월급을 받았다. 방고는 그들이 이름 대신에 불리던 번호를 뜻한다. 당시 성인 남자의 월급은 1개월에 17달러였고, 여자나 소년의 경우 1일 50센트에 불과했다.

지난 1902~1905년 인천 제물포에서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던 이민자들이 사용했던 '방고', 노동자들은 이름 대신 숫자를 뜻하는 방고로 불렸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품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역사적 자료와 개인의 증언에 따라 이민자들의 생활은 농노처럼 일하면서도 일부 자유가 주어지는 등 다양했다”고 했다. 이어 “다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 그들이 자율적 의지의 삶이었는지, 농노와 가까운 삶인지는 의견이 갈린다”고 했다.

일부 이민자들 중에는 미국 본토보다 턱 없이 낮은 월급에 불만을 가지고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이주를 결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이 역사학자들이 하와이 공식 이민이 미국 대륙의 본토 이민의 마중물로 보는 이유다. 김 관장은 “분명한 점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돈을 벌고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이들이 일본의 침략 이후엔 아예 뿌리를 내릴 생각을 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진영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964년 미국 이민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미국 대륙의 이민자들의 대다수는 하와이 이민자의 성격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고국에 대한 구국운동과 높은 희생정신 등이 미국 이민자 사회 전반의 성격을 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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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02~1905년 인천 제물포에서 미국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던 이민자들이 하와이의 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특별전 ‘그날의 물결, 제물포로 돌아오다’ 제공. (우측하단)지난 1910년 평안남도에서 하와이로 떠난 사진신부 임옥순씨와 그의 남편의 모습. 개리 박 하와이대 명예교수 제공

하와이行 ‘사진신부’… 독립운동 ‘해방신부’

신랑감 사진 1장 의지한 채 머나먼 뱃길 올라...근대 문화 열망·봉건제 반감 깨어있는 여성들

“어머니의 삶엔 스스로를 위한 시간이 한 순간도 없었다…(중략)…하지만 ‘포와(하와이)’ 에선 결혼한 여자들도 공부할 수 있다. 그것 만으로도 ‘포와’는 낙원이었다.”

작가 이금이의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사진 1장에 평생의 운명을 걸고 하와이로 떠난 열여덟 살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이 책에서 ‘사진신부’는 단순히 결혼을 위해 하와이로 향하는 여성들이 아닌, 근대 문화에 대한 열망과 봉건 제도에 대한 반감을 가진 역동적인 선택으로 비춘다.

26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사진신부는 사진만 보고서 결혼을 하기 위해 하와이로 향한 1910~1924년까지의 여성 이민자들을 통칭한다. 당시 미국은 노동이민은 금지했지만, 결혼에 따른 입국은 예외적으로 허용했다.

최사라씨가 23살의 나이로 하와이 땅을 밟아 사진신부 1호에 이름을 올린 뒤, 24년간 1천56명의 여성이 사진신부를 택했다.

앞서 이민 초창기인 1903~1905년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 이민을 떠난 이민자의 대다수는 돈만 벌어 조국으로 돌아가려했다. 이 때문에 이민자 대부분은 가족 단위가 아닌, 노동력이 있는 성인 남성 1인이다. 다만 이들은 1905년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일본의 주권 침탈이 가속화하자,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 대신 가족을 이루고 (하와이에)자리 잡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사진신부가 등장한 것이다.

사진신부는 하와이 이민 사회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주요 변곡점으로 꼽힌다. 노동이민자 중심의 이민자 문화가 가족 단위의 한인 사회로 꾸려지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사진신부들은 이민사회의 주류 문화인 높은 교육열·구국운동·여성을 중심으로 한 경제 활동 등을 형성했다.

사진신부들은 대체로 노동이민자인 남편보다 학력이 높고, 근대교육을 받은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이들은 사진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 탓에 남편과 나이 차이가 평균 15살 이상이 차이가 났고, 이 때문에 더 오랫동안 경제활동을 하면서 이민자 사회의 주축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사진신부들은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은 많았지만,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매우 높았다. 이들의 교육열 덕분에 1930년대 한인 청소년들(10~20세)의 문맹률은 전체 평균 3.1%는 물론, 중국(0.7%)이나 일본(0.5%)보다 훨씬 낮은 0.1%에 그친다.

특히 사진신부의 등장으로 하와이 사회의 독립운동은 무장 투쟁운동에서 나아가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으로 전개할 수 있는 자양분으로 작용한다. 사진신부들은 시대에 따라 신명부인회, 대한부인회, 대한인애국부인회 등을 만들어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여성들은 자녀들의 국어교육을 도맡아서 하거나, 가정 내 일본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운동을 하기도 했다.

책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 이야기’ 집필에 참여한 김점숙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부교수는 “사진신부의 등장은 한인사회를 만드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며 “여성들은 자신만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한인사회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이어 “미주한인사회의 높은 교육열과 헌신적인 삶이라는 정체성은 이때부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하와이 이민사회와 종교 기독교·천도교, 평등·자유를 깨우다

고국 패망 소식에 민족주의까지 더해져 독립운동 전초기지 역할… 각종 자금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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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자들이 처음 세운 최초의 한인 교회인 ‘하와이그리스도감리교회’의 현재 전경. 하와이그리스도감리교회 제공

하와이 이민자 사회는 평등과 자유를 기초로 한 기독교와 천도교(동학)가 자리잡은 뒤, 민족주의 이념까지 더해져 종교단체들이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우뚝서기도 했다.

26일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에 따르면 하와이의 첫 한인이민자 102명 중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다. 이민자들은 하와이 땅에서 교회를 가장 먼저 만들면서 유입 이민자들의 적응을 도왔다. 이민자 대부분은 한인감리교회에서 한국어 교육을 배우고, 고국에 대한 정체성을 키우는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천도교는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가 손병희를 주축으로 조선 사회에 퍼져나가다, 이듬해에는 하와이 이민사회에까지 등장했다. 1928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 리버스트리트에 ‘천도교하와이종리원’이 자리잡기도 했다.

종리원은 하와이 이민자 사회에서 천도교가 발행하는 종합 월간지 ‘개벽’을 통해 대대적으로 천도교의 정신을 홍보하고, 민족주의 이념까지 확장했다. 종리원은 종교활동 뿐 아니라 민족교육활동을 활발하게 이어나간다. 또 이들은 조선어학교를 만들어 한글을 통한 민족해방운동에 전념했다.

비록 이들의 규모는 기독교에 비해 작았지만, 한인사회의 통합과 민족주의 이념을 퍼뜨리는데 집중했다. 그 결과 하와이 한인 사회에서 감리교(기독교)와 천도교는 일본의 극심한 한글 탄압에도 민족의 얼을 지킬 수 있는 한글학교 25곳을 운영했다.

백태웅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장은 “을사늑약 이후로 하와이 이민자들은 고국이 망했다는 사실에 절망적인 마음을 독립운동에 투사했다”며 “그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 바로 종교단체”라고 했다. 이어 “종교단체를 근간으로 이민자들은 임시정부에 준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단체로 발전했다”며 “이들 종교단체는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위한 변호사 비용 같은 각종 자금을 모으기도 하는 등 이민사회 독립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고 했다.


인터뷰_ 하와이 이민 3세 개리 박 교수 “안타까운 고국 소식… 독립 열망 활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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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가족들을 위해 불고기와 만두와 같은 고향의 음식을 만들면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습니다.”

하와이 이민 3세 개리 박(Gary Park) 하와이대학교 명예교수는 26일 중구 하버파크호텔 1층 카페에서 종이에 본인의 한국 이름인 ‘박영기’를 또박또박 정자로 써 내려가며 이 같이 말했다.

그의 외할머니는 지난 1910년 하와이로 이민간 사진신부 임옥순 여사다. 박 교수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낯선 땅에서 12명의 자식을 억척스럽게 키워낸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그는 “영어를 못하는 할머니와 사실 언어로서는 소통이 어려웠다”며 “그래도 몸짓 발짓으로 가까워져 누구보다 절친이라 자부한다”고 했다.

임 여사는 1894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으며, 4살에 일본군의 손에 부모님을 잃는다. 박 교수는 “외할머니의 부모님은 교사였다”며 “위태롭던 시절에 바른 소리를 하다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임 여사는 일본의 침략에 결국 16세 어린 나이에 사진신부로 하와이행을 택했다. 임 여사는 오하이우 섬의 쿠니아 농장에서 사탕수수밭과 파인애플밭에서 15년 동안 매일 힘든 일을 했다.

박 교수는 한국에 대한 정체성을 외할머니의 음식을 통해 전달받았다. 박 교수는 “명절에 온 가족들이 둘러 앉아 송편이나 만두를 빚었는데, 그때마다 ‘아 내가 한국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외할머니가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고 회상한다. 그는 “외할머니는 매일 10시간씩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고 고작 17달러의 월급을 받았다”며 “이중 상당 부분은 독립운동을 위해 기부하는 등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조국에 대한 사랑이 컸다”라고 했다.

박 교수는 차세대 이민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정체성 확립 교육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모국에 대한 정체성을 이해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하와이인, 한국인 2가지 정체성을 모두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단, 초대 이민자들의 희생적 삶과 고통을 자양분으로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김지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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