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트맨’은 오래된 초고층 빌딩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컴컴하고 칙칙한 분위기의 ‘고담(Gotham)’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도시는 공권력도 힘을 못 쓸 만큼 온갖 범죄가 극성을 부려 배트맨이라는 히어로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밖에 없는 곳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고담시의 이미지를 이러한 모습으로 연출한 것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도시의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와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며 고담이라는 도시에서는 별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리라.
요즘 건설된 지 30년이 되는 1기 신도시를 초고층, 초고밀로 재건축할 수 있도록 조속히 허용해 달라는 요구를 접하며, 만약 요구대로 1기 신도시 전체가 30~50층의 초고층, 고밀도로 재건축될 경우 앞으로 30년 후의 모습과 그 이후의 낡은 도시는 어찌해야 할까 상상해 보면 고담이라는 도시 이미지와 겹쳐지는 느낌도 드는데 과한 걱정일까.
분당, 일산, 평촌, 중동, 산본 등 1기 신도시 아파트의 최초 입주가 1991년 10월부터라고 하니 5개 신도시 전체 주택 수인 30만여가구가 앞으로 건설된 지 30년이 되는 노후 주택으로 대거 편입된다. 주민 입장에서는 좁은 주차장, 낡은 설비 등으로 인해 최신의 아파트단지로 재건축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구일 것이다. 그러나 옷이라면 첫 단추를 잘못 채우더라도 다시 풀고 채우면 되지만 도시는 한 번 잘못 건설되면 돌이킬 수 없을 뿐더러 실로 막중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치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므로 몇 가지 수반되는 문제부터 함께 해결해야 원활히 추진돼 주민 입장에서도 원하는 쾌적한 주거환경과 경제적인 가치를 더 빨리 보전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1기 신도시보다 더 오래된 노후 원도심과 개발 시기가 유사한 서울, 지방권 등의 노후한 신시가지나 공공택지와의 정책 형평성을 고려해 보다 균형적이고 종합적인 정비 대책을 마련함으로써 갈등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
둘째, 수백개나 되는 1기 신도시 아파트단지를 정비할 경우 주변 부동산 시장에 미치는 부작용이 클 것이므로 인근 유휴토지나 진행 중인 공공택지를 활용해 순환 이주단지로 먼저 조성한 후 순차적으로 정비하는 방식의 계획이 수립돼야 한다.
셋째, 1기 신도시 재정비는 단순히 부동산 측면의 재건축이 아니라 대중교통지향형(TOD) 콤팩트시티, 탄소중립, 모빌리티,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과 연계한 스마트시티 등 새로운 미래 도시로 거듭나는 종합적 도시 재창조 전략으로 추진해야 한다.
이 같은 선결 과제에 대한 기본전략을 우선 수립하고 관계기관과 지자체, 시민 등과의 사회적 협의 과정을 충분히 거치고 추진해야 주민에게도 이익이고 사회·경제적으로도 상생, 발전하는 동인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사전 준비를 위한 지혜와 인내의 시간이 필요할 때다.
김동근 LH 경기지역본부 지역균형재생처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