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년이 고국 땅을 밟았다. 조국을 떠난 지 30여년 만이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1진이 환국했던 1945년 11월3일이었다. 백범 김구 주석의 비서 자격으로였다.
귀국 후 4개월 한국소년군 총본부 이사장에 추대된다. 1년 뒤에는 비상국민회의 선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선출된다. 남북 협상 정국에선 한국독립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김구 주석을 따라 북한을 방문한다. 그러다 6·25전쟁 발발 이후 납북됐다.
1956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강제로 가입해 상임위원 겸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북한에 억류된 인사 가운데 제일 젊었다. 이후 김일성 체제를 거세게 비판하면서 단식투쟁을 벌이다 1958년 9월10일 타계했다.
여주 출신 일파 엄항섭(一波 嚴恒燮)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금사면 주록리가 고향이다. 선생은 어떻게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됐을까. 고려대 전신인 보성법률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항저우(杭州) 즈장(之江)대를 졸업한다. 이후 상하이에서 언론활동을 하다 1929년 재중국 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된다.
이후 상하이 프랑스 조계국에서 근무하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갔다. 그 시절 김구 주석의 ‘백범일지’를 등사기로 일일이 인쇄했다. 주석직을 수행하던 백범 선생을 보좌하면서 그의 최측근이 된다. 김구 주석이 있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이나 활동 등을 미국 교포들에게 알리는 일도 선생의 몫이었다. 재원 마련도 그랬다.
선생은 납북됐지만 북한에 억류됐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인정받은 건 1989년이었다. 선생이 서거한 지 꼭 29년 만이었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됐다.
그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정했던 계기는 3·1독립운동이었다. 104년 전 오늘이었다. 선생의 나이 불과 2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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