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위 신비한 우주’…튀르키예 전통 미술 ‘에브루’ [예술, 어디까지 해봤니]

예술의 세계는 무궁무진합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인간의 창조성이 필요한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예술이 피어나기 마련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누구도 가지 못하고 닿지 못한 예술의 영역을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개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술의 세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첫 번째 순서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튀르키예의 전통 민족 예술인 에브루를 만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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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영 작가가 작업하고 있는 모습. 작가 제공

 

물 위에 안착한 물감 몇 방울이 마침내 하나의 우주가 된다. 붓을 떠나 수면 위로 떠오른 물감을 이리저리 휘젓다가 형상을 만들어낸 뒤, 종이로 덮어서 걷어내면 종이에 또 하나의 세계가 담긴다.

 

‘에브루’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튀르키예의 전통 민족 예술로 한국의 민화와 유사한 지위와 파급력을 지녔다.

 

에브루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기름 위에 떠오르는 아크릴 물감의 신비? 그렇지 않다. 에브루는 해조류 가루와 뒤섞인 점성 있는 물에 자연에서 채취한 천연 안료와 소의 쓸개즙을 섞어 만든 물감이 만들어내는 세계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사전 준비 단계부터 많은 정성과 노력이 요구된다. 구하기 힘든 재료로 힘들게 제작한 물감의 수명도 짧아 보관이 어려운 데다 그림을 그리기 전, 어떤 형상을 만들어낼 지에 따라 물감의 농도 역시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에브루의 주요 테마는 자연, 그중에서도 꽃이다. 튀르키예 현지 작가들은 꽃을 비롯한 자연물을 많이 그리는데, 꽃을 얼마나 섬세하게 그리느냐가 실력을 좌우한다고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 문화권에 따른 특성이 반영됐기 때문에 경전 코란의 문구를 그림과 함께 적어서 작품으로 승화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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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영 작가(오른쪽)가 지난달 29일 오후 작업실에서 진행된 에브루 체험 수업에서 수강생들에게 에브루를 알려주고 있다. 송상호기자

 

튀르키예 현지에서 에브루를 7년여 익힌 뒤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는 장혜영 작가. 지난달 29일 서울 잠실한강공원 사각사각플레이스 작업실에서 열린 원데이 클래스를 통해 여전히 한국에서 낯설게 다가오는 에브루의 이모저모를 듣고 실습을 해볼 수 있었다. 

 

간이로 마련한 체험이기 때문에, 에브루의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만의 에브루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성취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작가에게 노하우를 간단하게 전수받아 우주를 표현한 듯한 매혹적인 그림과 엉망진창이지만 탐스러운 꽃 그림을 무사히 그려냈다.

 

한 손으로 붓을 받치고,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툭툭’ 안료를 털어내야만 수면 위에 원하는 형상이 생겨난다. 물감을 떨어뜨린 뒤,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 송곳을 수면에 갖다대는 작업이 이어진다. 이때 중요한 건, 트레이 바닥에 송곳의 끝이 닿지 않게 하는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송곳이 바닥에 묻어 있던 이물질이나 잔여 물감을 긁어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 수 있어서다. 작가의 말을 경청하면서 작업을 이어가도 섬세한 손짓의 조절이 어려워 제법 애를 먹는다. 중간에 작업을 망친 것 같아도 신문지 등으로 물감을 흡착해서 제거할 수 있어 낙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위안을 준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졸업한 뒤 바로 취업하기보다는 뭔가를 더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오르게 된 튀르키예 유학길. 당시만 해도 현대 기아 등 국내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중동 지역과 관계된 국제 마케팅을 염두에 둔 채 출국해 튀르키예어를 1년 간 배웠고, 이스탄불대학교 국제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에브루와의 만남은 그때부터였다. 거기서 알게 된 친구들을 통해 에브루를 처음 접했다. 처음에 그는 스승을 10명 넘게 찾아다녔고, 그를 가르치게 됐던 현지 교수진들은 한국인을 처음 받아본다며 흥미롭게 여겼다.

 

기관에 공식 등록된 전문가들이 제자를 양성하는 과정, 대중들이 친근하게 즐길 수 있는 간소화된 입문 과정에 따라 학습 및 수련 방식이 나뉜다. 장 작가는 “전문적으로 배울 게 아니라면, 에브루를 간소화해 접하는 데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다”면서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구분하는 경계가 희미할 수 있지만, 현지에서는 그만큼 진입장벽이 낮아 보급이 많이 될 수 있는 환경”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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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①송상호기자가 장혜영 작가의 설명에 따라 에브루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 작가 제공 ②기자가 그린 에브루 작품 두 점. 송상호기자

 

민족의 혼이 깃든 전통 예술이지만, 튀르키예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전통을 계승하고 보존하는 데 초점을 맞춘 예술가들과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에브루의 매력을 알리자는 예술가들이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 현재 가장 활발한 행보를 보이는 튀르키예 출신의 가립 아이(Garip Ay) 작가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금기시하는 소재를 서슴없이 표현하고, 대형 기업 등과 다양한 협업을 이어간다. 그는 2017년 SK이노베이션과 함께 수출 선박, 화학 원소, 전기차 배터리 등을 그림으로 풀어낸 광고 작업을 소화하기도 했다. 가립 아이와 같은 이들은 그려야 하는 것만 그리고, 지켜야 하는 것만 지키는 데에 의문을 표한다. 에브루를 매개로 세계인과 소통하기 위해 이들은 소재와 기법에도 다양한 변화를 주면서 경계를 확장하려고 한다.

 

장 작가는 신비한 에브루의 매력이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사람들이 주변에서 쉽게 에브루를 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사람들과 만나려고 한다. 그는 “그간 제 전시를 위한 작업에만 너무 몰두한 것 같아서 이젠 소통에 무게를 싣고 싶은 마음”이라며 “SNS를 적극 활용하고, 평면에서 벗어나 미디어파사드 등 미디어아트와도 연결해 표현하는 매체의 경계도 확장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장 작가가 전시를 할 때마다 그의 팬을 자처하며 작품을 꼭 보러 간다는 박예란씨(35)도 이날 기자와 함께 작가가 마련한 수업에 참여했다. 박씨는 “최근에 생각한 대로 일이 안 풀려 스트레스 받는 일이 너무 많아 마음을 힐링하고 싶어서 수업에 왔다”면서 “수면 위 물감이 퍼져나가는 방향과 속도를 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걸 보니 어쩌면 이게 삶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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