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맺은 가족... 우린 둘도 없는 모녀지간”
지난 22일은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가정위탁의 날’이었다. 흔들리는 가정, 갈 곳 잃은 아이들, 한순간에 남이 되는 가족.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가 희미해진 지금, 가정의 달 5월은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들여다보는 기간이다. 몸으로 낳은 자식도 연을 끊고 남남이 되는 시대가 됐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아도, 서류상 ‘동거인’으로 남아 있어도 끈끈한 가족이 된 사람들이 있다.
팔순이 넘은 윤미자씨(82·부천시 소사본동)의 곁을 지키는 건, 남편도 아니고 친구들도 아니다. 그가 가슴으로 낳은 20대 딸 A씨가 든든한 버팀목처럼 윤씨의 곁을 지킨다. 처음엔 부모가 될 생각은 없었다. 부모의 형편이 괜찮아져 다시 데려가겠다고 찾아오면 주저하지 않고 요청을 수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친부모는 A씨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그렇게 윤씨 모녀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엄마와 딸이 됐다.
1988년 부천에서 놀이방을 운영하기 시작한 윤씨는 1992년부터 어린이집 원장으로 지역 내 보살핌이 간절한 아이들과의 접촉 기회를 늘리는 데 집중했다. 자식들은 장성해 결혼한 뒤 독립했고, 남편은 이미 곁을 떠났다. 그때마다 윤씨의 곁을 지킨 건 역설적이게도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이었다.
1995년 무렵부터는 버려지는 아이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당시 경찰은 아이들을 구청 사회복지과로 인계했고, 구청 직원들은 인근 어린이집 원장들에게 2, 3일만 아이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대부분 거절했다. 윤씨는 차마 그 아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A씨를 만난 건 2002년이었다. 20대 초반의 미혼모가 어린이집에 맡긴 5개월된 아기. 지금은 둘도 없는 동반자인 딸과의 만남은 그때부터다.
여전히 공문서는 A씨를 그의 친모와 가족으로 묶어 뒀다. 윤씨와 딸은 서류상으로는 그저 ‘동거인’ 관계일 뿐이다. 가정위탁은 입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윤씨는 “입양이니 위탁이니 그런 걸 언제 다 따져서 키우겠냐. 난 그저 딸이 잘 자랐으면 하는 마음만 있었다”며 “내가 공식적으로 부모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냥 내 아이라고 여기고 키웠을 뿐이고, 앞으로도 내 아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런 윤씨의 마음을 딸도 알아줬기 때문일까. A씨는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하게 자라 성인이 됐고, 공부뿐만 아니라 각종 예체능 분야에서 다재다능한 면모를 뽐낸 덕에 윤씨의 얼굴에서는 함박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A씨는 이제 엄마 보고 걱정하지 말라면서 내가 엄마를 지켜주겠다고 손을 꼭 잡는 의젓한 딸이다.
초등학생 때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던 노모의 눈엔 20년이 넘는 긴 세월이 응축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언젠가 딸한테 ‘나를 엄마라고 부를래? 할머니라고 부를래?’라고 물었는데, 딸이 ‘엄마라고 부르고 싶어요’라고 하더라고요. ‘네 마음이 원하는 대로 부르라’고 그냥 웃었죠. 그렇게 저는 딸을 마음으로 낳은 엄마가 됐습니다.”
윤씨는 “가족의 의미는 외부에서 정해주는 게 아니다. 가족을 이룰 당사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린 문제”라며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가정위탁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따스한 가족의 품이 있어야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 아니겠나”라고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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