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명맥을 이어가는 김광선 광흥대장간 대표

김광선 광흥대장간 대표. 한상훈기자

 

“이제 기력이 달려 작업을 많이 하지 못해요. 그래도 찾아오는 단골들이 있으니 문을 닫을 수는 없네요.”

 

광주에서 3대째 대장장이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광흥대장간 김광선 대표(80)의 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김 대표까지 광흥대장간의 이야기는 100년의 역사를 담고 있다.

 

처음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가 시작된 것은 광주시 역동, 현재의 식자재 마트 건너편이다. 길이 나며 현재의 장소로 이전했다. 할아버지의 형제가 다섯으로 대장간 이름은 오형제 대장간으로 지었다. 

 

옛날의 대장간은 지금보다 다섯 배는 컸다. 직원도 10여명에 달했다. 하루에 한 대씩 마차를 제작하고 말 편자만 70마리분을 박았다. 대장간이 장터 옆에 위치하며 장이 서는 날이면 눈코 뜰 새 없었다. 그야말로  화장실 갈 시간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며 망치 두드리는  소리는 점차  줄어들었다. 일본식 마차가 들어오고 리어카가 나오면서다. 경운기가 나오면서부터는 더 이상 마차를 만들지 않았다.

 

김 대표에게 어린 시절 대장간은 놀이터이자 아지트였다. 나고 자란 곳이 대장간이다 보니 누가 알려 준 것도 아니고 일부러 배운 것도 아니지만 대장간 일은 어떤 일보다 친숙했다. 

 

군대를 제대하고는 자연스럽게 대장장이의 길을 걷고 있다.

 

대장간 내부. 한상훈기자

 

광흥대장간에서 만들지 못하는 물건은 없었다. 호미와 낫, 괭이 등 농기구부터 식당과 가정에서 쓰는 무쇠 칼과 산업현장에서 사용되는 부품들까지. 나무로 된 손잡이부터 직접 깎고 만든다. 가마에 불을 붙여 풀무질을 하고 쇠를 녹인다. 수백, 수천 번의 망치질을 해야 한 개의 물건이 만들어진다.

 

호미라고 같은 호미가 아니고 낫이라고 같은 낫이 아니다. 생선가게나 정육점에서 사용하는 무쇠 칼은 일반의 그것과 비교를 거부한다. 투박하고 묵직하지만 사용하기가 수월하다. 손잡이를 잡아 보면 감기는 느낌부터 다르다. 사용해본 사람만이 진짜 느낌을 알 수 있다. 좋은 물건을 사용해야 힘이 덜 들고 능률도 오른다. 

 

중국산 호미와 낫, 농기구 등이 수입되고부터는 대장간 일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지금은 인근 상인들이 가지고 오는 주방용 칼이나 오랜 단골들이 가져오는 농기구 등을 손 보고 있다. 간간이 무뎌진 산업용 드릴에 사용되는 ‘정’ 등을 갈아 달라고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김 대표는 “인근의 성남이나 이천, 여주 등에도 대장간이 있었는데 현재는 이곳만 남았다고 들었다. 넓은 곳으로 장소를 옮겨 새롭게 시작할 생각도 했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후계자가 없으니 이곳도 내가 없으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며 “시대가 바뀌었다. 기계가 나오며 일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나이가 들어 기력이 약해졌지만 광흥대장간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는 한 대장간의 문은 열어 놓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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