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만, 지운 흔적 속, 넘나드는 장르 속 만나는 이강소의 실험과 철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강소: 風來水面時 풍래수면시’ 
실험 미술 선보여 온 거장의 세계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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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 작가. 사진 박찬우,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강소 작가(81)는 실험적인 작가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인 그는 작품을 표현하는 데 장르와 재료, 표현기법, 예술사조를 넘나는다. 그림, 판화, 비디오, 퍼포먼스, 입체환경적 설치, 사진, 도예 등 모든 매개체가 그의 작품성을 표현하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관객에게 특별히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지도 않는다. 직감과 휴의로 만들어진 작품을 관객이 스스로 상상하고 이해하길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늘 관객과 소통하는 작가로도 불린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지난 1일 개막한 ‘이강소: 風來水面時 풍래수면시’는 이미지의 인식과 지각에 관한 개념적인 실험을 지속해온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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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는 ‘이강소 풍래수면시’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명 ‘풍래수면시’는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이다. 새로운 세계와 마주침으로써 깨달음을 얻은 의식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송나라 성리학자 소옹(邵雍, 1011~1077년)의 시 ‘청야음(淸夜吟)’에서 따왔다. 회화와 조각, 설치, 판화,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지방식을 질문하고 지각에 관한 개념적인 실험을 지속해온 작가의 예술세계를 함축했다.

 

전시는 197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작가가 꾸준히 탐구해 온 두 가지 질문에 초점을 맞췄다. 첫 번째 질문은 창작자이자 세상을 만나는 주체로서 작가 자신의 인식에 대한 회의다.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며 창작자로서 작가의 의도적 행위를 내려놓고, 새로운 감각과 경험의 가능성을 작품에 담고자 노력한 이강소의 궤적을 작품 100여 점을 통해 따라간다.

 

두 번째 질문은 작가와 관람객이 바라보는 대상에 대한 의문이다. 명동화랑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의 ‘소멸-화랑 내 선술집’(1973)에서부터 시작한 객관적인 현실과 그 현실을 재현한 이미지에 대한 작가의 의심은 텍스트와 오브제, 이미지를 오가며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 질문을 던진다. 작가의 방법론은 직설적이고 이론적인 개념의 관철이 아니라 참여자이자 관찰자인 감상자에게 다양한 인지의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단일한 세계가 아니라 멀티버스와 같이 무한히 뻗어나가는 작품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는 마치 “우리의 세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경험과 기억 속에 단일한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이 자신이 인식한 세상 속에서 가상의 시공간을 창조한다”고 제안하는 작가의 외침 같기도 하다.

 

첫 번째 질문으로 시작하는 제3전시실에선 작가가 실험미술에 전념하던 1970년대 중반 이후 창작자로서 작가의 역할과 한계를 질문하던 시기의 작품에서부터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새로운 매체를 처음 접한 후에도 지속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비디오 작업 ‘페인팅 78-1’(1978)과 누드 퍼포먼스 ‘페인팅(이벤트 77-2)’(1977)는 이 시기 작가의 실험 세계를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각각 그리는 행위를 통해 오히려 작가 본인이 지워지거나, 작가의 몸에 묻은 물감을 지워내는 과정에서 회화 작품이 만들어졌다. 비디오 작업 ‘페인팅 78-1’(1978)과 연계해 작가가 1977년 리화랑 옥상에서 유리에 칠을 하며 실험한 사진 작업이 처음 발굴돼 전시를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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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 ‘무제 - 91193’, 1991, 캔버스에 유화 물감, 218.2×291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작가 지우기’의 노력은 실험미술 시기를 거친 후 지각하는 대상의 존재를 의심하며 표현하는 추상과 구상회화의 단계로 나아간다. 1980년대 초 추상적 드로잉을 시작, 미국 시기를 거치고 작가는 창작자의 의도대로 감상자가 작품을 해석하는 데 회의를 느끼며 회화의 새로운 접근방식을 고민했다. 이런 고민은 감상자의 마음과 생각, 기억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작가적 태도로 발전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선보인 집, 배, 오리, 사슴 등의 구상 시리즈다.

 

동양철학과 양자역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모든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철학적 이해 아래에서 자연스럽고 강한 붓질로 이를 캔버스에 담아냈다. 작품 ‘사슴’은 여러 순간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낸 듯 형태가 고정되지 않고 움직임이 느껴진다. 다양한 각도의 모습이 중첩돼 마치 입체주의적 회화나 피카소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단일한 주체는 없으며 존재는 불안정하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자신의 철학을 회화적 실험으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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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①이강소, ‘무제-7522’, 1975(2018 재제작), 캔버스에 디지털 C-프린트, 돌, 가변크기. ②이강소, ‘무제 - 762000’, 1976, 캔버스에 스크린프린트, 아크릴릭 물감, 50×65.2cm.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제4전시실에서는 초기 작업부터 2000년대 회화에 이르기까지 바라보는 대상을 의심하며,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를 고민한 이강소의 작업세계를 살펴본다. 작가가 활발히 활동했던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그룹 시절의 지적, 철학적 탐구와 인지 실험의 작품들과 초기작 ‘무제-7522’(1975, 2018 재제작), ‘무제-76200’(1976)와 함께 초기 주요 설치작 ‘근대미술에 대하여 결별을 고함’(1971, 2024 재제작) 등을 재제작해 최초로 선보였다. 전시는 내년 4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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