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낭만 대신 폭설로 맞이한 첫눈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눈은 살아 있다/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기침을 하자/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기침을 하자/눈은 살아 있다/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1960년대를 풍미했던 김수영 시인이 읊은 ‘눈’이다. 서울 토박이였던 그가 원고지에 이 작품을 쓰던 날도 오늘처럼 폭설이 내렸나 보다. 그가 시를 통해 녹여 냈던 서정은 반듯했다. 일체의 정립된 언어와 고정된 언어 등을 부정직한 것으로 여겨서다. 오늘 같은 날씨에 읽으면 제법 근사하다.

 

눈을 소재로 한 소설도 있었다. 이청준 작가의 ‘병신과 머저리’다. 6·25전쟁의 아픔을 안고 사는 제대 군인의 실존적 고통을 담았다. 4·19 전후에 청년기를 보냈던 젊은이의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고통도 그려졌다. 소설을 통해 내면의 고통을 해소하려는 시도나 뚜렷한 형체 없이 존재하는 정신적인 고통의 묘사가 돋보였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눈이 오는 날이 좋겠어. 그 사이에 포성이 오면 또 생각을 달리해도 될 테니까. 그러고는 금방 눈이 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눈이 오고 있다, 김 일병’.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나서 다시 김 일병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작품의 얼개는 6·25전쟁의 정신적 상처로 고통받는 의사인 형과 고통의 원인조차 알지 못하는 화가 동생의 이야기다. 의무병으로 참전했던 형은 그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통해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자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오관모와 김 일병, 나(형)는 전쟁에서 낙오된 패잔병이다. 김 일병을 죽이겠다고 하는 오관모와 김 일병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나, 그 잔인한 날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올 겨울 들어 처음 내린 눈이 폭설로 번진 날에 되짚어 보는 단상이 어지럽다. 2024년 첫눈은 후세에 어떻게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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