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삼일천하’ 갑신정변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조선이 근대국가로 도약할 수 있었던 ‘10년의 세월’을 잃어 버렸다. 역사학계가 내린 명쾌한 정의다. 갑신정변 얘기다.

 

그 현장으로 되돌아 가보자. 서울 한복판에선 근대식 우편제도인 우정총국 개설 축하연이 열렸다. 그때 우정총국 인근 민가에서 불길이 솟아 올랐다. 잔치가 열리던 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른바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시작이었다. 1884년 12월4일이었다.

 

사태는 결국 피를 불렀다. 경우궁으로 피신한 고종을 찾아온 조영하와 민태호 등 대신 11명의 목도 잘렸다. 일본군 200여명을 등에 업은 개화파는 이튿날 곧장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정변 사흘째 오전 고종은 혁신책을 내놨다. 거사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을 뒤집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 1천500여명에게 밀려서다. ‘일본군 1명이면 청나라 군대 20명을 이길 수 있다’던 호언장담과는 달리 첫 싸움에서 병사 30여명이 전사했다.

 

갑신정변은 ‘위로부터의 변혁’이었기에 혁명이라 불리지 않는다. 김옥균은 박영효와 서재필, 서광범 등과 패주하는 일본군을 쫓아갔다.

 

군중의 분노는 심화됐다. 박영교와 홍영식이 백성들의 손에 살해됐다. 김옥균의 생가와 일본 공사관 등이 불에 탔다.

 

평가는 아직도 엇갈린다. 분명한 건 이 사태가 재정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고종의 위임장을 소지한 김옥균이 시도한 일본에서의 국채 발행이 ‘위임장은 위조’라는 수구파의 모함으로 무산됐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8개월 전의 일이다. 견제 세력이 없어진 수구파는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의 권고대로 악화(惡貨)인 당오전을 찍어 냈다. 인플레에 찌든 민초의 마지막 고혈은 왕처럼 군림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위세를 업은 청상(淸商)에 의해 다시 짜였다.

 

특별한 자성과 노력이 없으면 잘못된 역사는 되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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