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예술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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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 경기도박물관장

동양의 서화는 서양미술에 비해 변화도 없고 재미도 없다. 검은 필묵만으로 승부하는 서화는 현란한 색과 구상 추상을 질주하는 아크릴 조형의 결정인 유화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호흡을 길게 해서 보면 거대한 예술혁명의 산맥이자 장강이 동양의 서화다.

 

경기도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명경단청-그림 같은 그림’을 보면 200년이 넘는 명나라 초기 중기 후기의 서화 산맥을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조선의 겸재 정선이나 추사 김정희에까지 연결되면서 더 큰 태산준령으로 전개됐음도 독화(讀畵)해낼 수 있다.

 

동기창과 김정희가 만들어낸 국경을 초월한 필묵공동체가 그 사례다. 동기창은 이미 17세기 초반에 초예기자지법(草隸奇字之法·초서, 예서, 초예, 전서와 같은 비일상적인 문자를 쓰는 법)으로 나무는 무쇠같이 구불구불하게, 산은 모래사장에 송곳으로 그어 젖힌 듯 입체적으로 써냈다.

 

요즘 말로 ‘큐비즘’을 한 것이다. 왜? 전적으로 문인의 기운(士氣)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 당시 철학 없는 직업화가들의 판에 박힌 그림을 전복시키는 방법론을 동기창은 그림이 아니라 이렇게 초예기자라는 글씨에서 제시했다. 글씨로 그림을 쓰면서 장르를 파괴시킨 것이다.

 

그래서 미국 클리브랜드뮤지엄 소장 동기창의 ‘강산추제도’ 같은 산수도는 엉뚱하게도 사각 삼각의 벽돌이나 원통 원추의 기하도형으로 해체된 세잔의 생빅투아르산이 연상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실제 동기창은 1607년 마테오리치가 한역한 유클리드의 ‘기하원본’과 같은 서학(西學)을 적극 수용했고 현장 사생도 열심히 해냈다. 그 결과 당-오-북송·남송-원-명과 같은 대륙의 역대 그림 고전의 방작(倣作) 위에 기운 생동하는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그림을 혁명시켜 냈던 것이다.

 

하지만 초예기자는 여전히 산과 나무를 여하히 그로테스크하게 형상화해 문인화가들의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를 표출해낼 것인가에 방점이 찍혀 있다. 말하자면 초예기자 그 자체로 시서화일체가 되는 이상적인 문인화의 실천은 동기창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이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한 몸인 글씨가 다시 텍스트가 이미지 뒤로 숨으면서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이미지 중심의 그림이 되는 것과 비유된다.

 

이런 동기창의 200년 묵은 난제는 19세기 중반 조선의 김정희가 왕희지 계통의 글씨와 그 이전 한나라 금석문, 즉 첩학(帖學)과 비학(碑學)을 혼융해낸 추사체(秋史體)로 업그레이드된 초예기자지법으로 난초와 시문을 구분 없이 써냄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풀었다.

 

그것이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다. 글씨와 난초는 그냥 획(劃)일뿐이다. 그림과 글씨의 구분이 무색하게 불이(不二)의 평등관계다. ‘불이선’이 뭔가를 시각화한 결정이다.

 

요컨대 동기창이 초예기자로 명나라까지 전개돼온 대륙의 그림 역사를 전복시켰다면 김정희는 다시 동에서 서로 현대미술의 문을 열어젖혔다. 이우환 윤형근의 점·선·바람 시리즈나 획면추상의 단색화가 뿌리를 추사체에 박아내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서화미술의 혁명도 없다. 서(書)가 예술혁명의 불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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