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주영진 일병, 1932년 인천 출생…사망 당시 18세 국유단 관계자 “너무 늦게 가족 품에 돌려드린듯해 송구스러워”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가 산화한 고(故) 주영진 일병이 75년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15일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은 2000년 10월 경북 경주시 안강읍 일대에서 발굴한 유해의 신원을 국군 제7사단 소속이던 고(故)주영진 일병으로 최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국유단은 2000년 4월 유해발굴사업을 시작한 이래 252번째로 6·25 전쟁 전사자의 신원을 확인했다. 국유단은 지금까지 1만1천여구의 유해를 찾았고, 그중 매년 25~30구의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사망 당시 고인은 18세였다. 1932년생인 고인은 인천 강화군에서 5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전북 전주에서 고교 재학 중 6·25전쟁이 발발해 북한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유가족에 따르면 당시 고인의 부친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 군대에 안 가도 된다”며 만류했지만 고인은 “전쟁이 안 났으면 모르는데 전쟁이 나서 나라가 어렵기에 빨리 가야 한다”며 집을 떠났다.
이후 대구 제2훈련소에 합류한 고인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을 시간도 없이 전선에 투입됐다. 이후 국군 제7사단 소속으로 ‘기계-안강 전투’에서 싸우다 1950년 9월6일 전사했다. 참전한 지 6일 만이었다.
기계-안강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던 시기에 국군 수도사단이 7사단 3연대를 배속받아 경북 포항시 기계면과 경주시 안강읍 일원에서 북한군 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방어 전투다.
‘호국의 영웅 귀환’ 행사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조카 주명식 씨(76) 자택에서 열렸다.
유가족 대표인 주 씨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삼촌을 잊지 않았다며 “고대하던 삼촌의 유해를 찾은 기쁨을 친족들과 나누겠다. 드디어 조상님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유단 관계자는 이날 경기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번 호국의 영웅 귀환 행사를 하러 인천 강화군에 갔을 때 조카분이 돌아가신 분의 생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며 “유가족뿐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이 다 나와서 유해를 반기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에 뭉클했다”고 말했다.
이어 “유가족들은 연신 ‘고맙다’고 하셨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바로 유해를 가족 품에 보냈어야 하는데 75년이나 걸려 오히려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유전자 시료 채취는 전국 어디에서나 가능하며 6·25전사자의 유가족으로서 전사자의 친·외가를 포함해 8촌까지 신청 가능하다. 제공한 유전자 정보를 통해 전사자의 신원이 확인될 경우 1천만원의 포상금도 지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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