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루이 잠페리니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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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쟁이 시절부터 유난히 뜀박질을 좋아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랬다. 고교에 진학해선 지역 대표 육상선수로 전국 단위 대회에 나갔다. 운동장에서 트랙을 힘차게 내디딜 때마다 관중의 환호가 쏟아졌다. 이들의 박수가 있었기에 늠름하게 달릴 수 있었다. 마침내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금의환향했다. 부모와 형제는 물론이고 이웃들도 자랑스러워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가 됐다.

 

전쟁의 포연이 지구촌을 엄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의 조국도 휘말렸다. 육상선수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국방의 의무가 다가왔다. 육군항공대 장교로 참전해 폭격기의 폭격수 역할을 맡았다. 구조 임무 수행 중 바다로 추락해 40여일간 표류했다. 실종 당시 대통령이 조문을 보냈다. 이후 마셜제도에 상륙해 포로로 잡혔다. 그의 순연은 여기까지였다. 미국의 육상선수 루이 잠페리니의 역정이다.

 

포로로 잡혔지만 수용소에서도 뛰는 연습은 계속됐다. 일본군의 엄중한 감시가 뒤따랐다. 고문도 당했다. 이 대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가 갇혀 있던 포로수용소의 수장이 장교가 아니라 병사였다. 전쟁이 끝난 뒤 알려졌지만 말이다. 미군 장교를 일본군 병사가 통제했던 셈이다. 비상식적인 처사였다.

 

종전 후 인생은 어떻게 이어졌을까.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아 미국으로 돌아 왔다. 종전 이후에는 용서에 대한 신념을 펼치면서 기독교 복음주의자로 변신했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당시 성화 봉송 주자로 일본도 방문했다. 40여년 만이었다.

 

이후 폐렴으로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세상을 떴다. 2014년 4월18일이었다. 사후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 ‘언브로큰’이 개봉됐다.

 

20세기 전반부를 살았던 육상선수가 겪었던 삶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에둘러 보여 주고 있다. 특히 포로수용소에서 일본의 불합리한 행태가 눈에 거슬린다. 전쟁은 인류의 민낯을 드러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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