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디엔비엔푸는 베트남의 변방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라오스와 인접한 소도시로 인구는 10만명 남짓하다.
이곳에서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이 벌어졌다. 1954년 5월7일이었다.
그때로 돌아가 보자. 당시 이곳에선 프랑스와 베트남(베트민)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베트민은 베트남 민족통일전선 조직으로 월맹으로 불렸다. 외신들의 보도는 이랬다. “(프랑스) 육군이 항공기로 장비를 공수하는 동안 베트민 병사들은 몸에 프랑스 육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포의 포신을 묶고 한번에 1인치씩, 하루에 반 마일씩, 3개월에 걸쳐 대포를 운반했다.”
디엔비엔푸는 베트남 주요 도시와 거점들로부터 한참 떨어진 오지에 분지였다. 사실상 육상 접근로가 없었다. 평상시 보급도 쉽지 않았지만 포위 당하면 구하러 갈 방법도,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프랑스는 이 지역을 평정하지 못하면 전황을 타개하기 힘들다고 보고 항공 보급과 공수부대만으로 요새를 건설했다.
문제는 처음부터 베트남 화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병력 열세와 보급 등을 화력과 항공 수송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현실은 달랐다. 베트민이 다수의 대공포를 포함한 포병화력을 동원해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또 간과한 게 있었다. 중국의 지원이었다. 중국은 1년 전 6·25전쟁에서 유엔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포, 대공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베트민에 무상으로 제공했다.
프랑스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프랑스군이 떠난 자리에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구호가 쓰인 베트민 깃발이 펄럭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프랑스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붕괴됐다. 베트남은 프랑스 지배에서 해방됐다. 이후 20년이 넘는 미국과 베트남 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베트남은 인도차이나의 변방에서 최대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인력이 우수하고 지하자원도 풍부해서다. 경제에서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 나라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이 밖에도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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