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아트앤테크놀로지 랩 소장·영상원 교수
오픈 AI의 영상 생성 서비스 ‘소라’의 새 버전으로 ‘지브리 프사’ 열풍이 번지자 해외 소셜 미디어에는 ‘RIP Animator(부고: 애니메이터)’라는 문구가 떠돌았다. 그리고 지난주 구글이 동영상 생성 프로그램 ‘VEO 3’와 ‘FLOW’를 선보이면서 그 부고장은 곧 ‘RIP Filmmaker(부고: 영화감독)’으로 바뀌었다.
구글이 유튜브와 구글 포토의 막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선보인 이 서비스는 창작의 민주화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2차 대전의 전장, 신비한 우주 탐험, 서울의 거리를 거니는 연인들까지—상상하는 모든 장면이 전문적 영상 지식 없이도 구현된다. 영화 제작 경험이 전무한 일반인조차 텍스트 몇 줄만으로 편집과 대사, 음향까지 완비된 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은 영상 길이가 짧고 완성도 또한 방송 수준에 못 미치지만 생성형 동영상 기술이 대중에 공개된 지 1년 조금 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기술의 발전 속도는 경이롭다. 누구나 영화감독이 될 수 있는 시대, 그리고 기존 감독들은 대규모 제작진 없이 상상력만으로 원하는 콘텐츠를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는 분명 창작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환영할 만한 변화다. 자본과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나 순수한 창의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신세계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냉혹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스태프 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전문 인력이 설 자리를 잃는다는 의미이고 모두가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창작자들의 경쟁이 그만큼 치열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해 초 마이크로소프트는 인공지능(AI) 투자에 집중하기 위해 전 세계 직원의 3%에 해당하는 6천여명을 해고했으며 놀랍게도 해고자 중에는 AI 부문 관리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미국의 한 시장 조사에 따르면 2026년까지 영화, TV, 애니메이션 분야의 10만개 이상 일자리가 AI의 직접적 영향권에 놓일 것으로 예측된다.
많은 이들이 AI 시대에도 과거 산업혁명 때처럼 사라지는 일자리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AI 혁명의 속도와 규모는 과거와는 그 성격과 차원이 다르다.
마부는 운전 기술을 배워 새로운 운송 수단인 자동차 운전기사가 될 수 있었지만 AI 시대에는 하나의 알고리즘이 수많은 운전기사를 대체하게 된다. 유발 하라리의 예언처럼 인간보다 뛰어난 기술의 발달로 수많은 사람들이 ‘무용 계급’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미래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노동과 직업은 단순한 경제적 수단을 넘어 자아 실현의 통로, 인간 존재의 증명이다. 한 평론가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가’는 결국 ‘우리는 누구인가’와 연결돼 있는데 AI 기술이 이런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던 근본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진단한다.
우리가 AI가 열어가는 신기한 가능성과 놀라운 효율성에 감탄하는 사이 누군가의 생계와 정체성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AI 시대의 개인적 경쟁력 확보 방안과 함께 이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혁신적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자신의 일자리 앞에, 그리고 국가 경쟁력 앞에 부고장이 날아 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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