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곤의 말글풍경] 남발하는 ‘앵커’ 호칭, 불편하다

강성곤 가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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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의 문제는 범주상 언어예절에 속하며 크게 보면 표준화법 테두리 안에 있다. 여기서 표준이라는 것은 절대적 구속력이 아니라 이상적이고 실효적인 교집합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 근사하고 세련된 화법을 구사할 수 있을까. 지칭·호칭에 있어 지향점은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의사소통의 실현에 있다. 물론 오만과 무례는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무엇보다 혁신과 창의성을 탑재해야 할 것이다.

 

방송미디어는 어떨까. 뉴스 프로그램에서의 호칭을 다뤄본다. 우선 앵커(맨)다. 1960~70년대 종합뉴스 시대를 연 미국의 월터 크롱카이트가 효시다. 1980~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 CBS의 댄 래더, NBC 톰 브로코, ABC 피터 제닝스는 소위 3대 앵커맨으로 불렸다. 본디 닻(anchor)을 내리는 사람, 중심을 잡아준다는 뜻이지만 지금은 카리스마 시대가 아니며 뉴스 아이템의 신속성과 정확성이 더 중요하다. 영국은 프리젠터(presenter)라고 하지 앵커라고 하지 않는다. 독일 및 프랑스도 모데라토어(moderator), 프레상테퇴르(présentateur), 즉 진행자 개념이다. 일본은 앵커 대신 게스다(캐스터·キャスタ)를 쓴다. 중국은 주츠런(主持人), 즉 뉴스를 주되게 이끈 사람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요컨대 앵커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며 특히 호칭의 쓰임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독 앵커에 부질없는 애정을 부여잡고 남발하는 우물 안 개구리는 대한민국 방송사들 뿐이다. 사회의 큰 이슈, 이벤트가 있으면 앵커 명칭의 난장이 TV에서 펼쳐진다. “광화문광장에 나가 있는 이지연 앵커를 불러봅니다. 이지연 앵커!”, “예. 이지연입니다.”, “이 앵커, 지금 그곳 분위기 어떻습니까?”(자막에 ‘이지연 앵커’) / “이번엔 인천공항, 김영호 앵커를 연결합니다. 김영호 앵커!”, “네, 김영홉니다. 공항이 꽤 붐비네요.”, “김 앵커, 상황 전해주시죠.”(자막 ‘김영호 앵커’)

 

무신경에다 군더더기 투성이다. 때론 아무개 정치부장, 아무개 경제부 차장이라며 사내 직위를 자막에 띄우고 호칭으로 쓰기도 한다. 직함·직책·보직 추종 사회 습속이 적나라하게 발현되는 모습이다. 위계·서열·귄위주의의 그림자가 여전하다는 징표 아닌가. 호칭이 소거되면 왠지 어색하고 불완전한 느낌의 불안심리와도 맥이 같다. 대안은 무엇일까. 비우고 덜어냄의 알고리즘이다.

 

“워싱턴의 볼프강 뮐러 연결합니다. 볼프강, 이번 사건이 테러와 연관이 있나요?” / “작센주 청사에 동료 에바가 나가 있습니다. 극우 시위가 다시 불붙는 모양새군요?”(자막 ‘에바 리히터’) 독일 공영방송 메인뉴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앵커나 기자를 호칭으로 안 쓴다. 어지간하면 이름만 부르며 간혹 베테랑급 시니어가 현장에 있을 때 성(性)과 이름을 함께 불러준다. 미국 영국 프랑스도 마찬가지. 일본 중국만 우리처럼 기자 호칭을 사용한다.

 

“경제·금융 담당하는 박상민, 나와 있습니다. 상민(씨)?” / “다음은 수원컨벤션센터 연결합니다. 예진! 외국 기업이 얼마나 왔나요?”(자막 ‘최예진’) / “일산 킨텍스에 나가 있는 동료를 불러볼까요? 희선, 관람객이 많이 보이네요.”(자막 ‘정희선’) 깔끔하고 산뜻하지 않은가. 초기엔 어색할 수 있지만 전향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불러튼 뉴스(Bulletin News·단신 위주 스트레이트 뉴스)의 리드(lead)도 개선이 필요하다. “한명준이 보도합니다.”, “강수영의 보돕니다.”, “보도에 윤기줍니다.”, “신지은이 취재했습니다.”, “취재에 임서진입니다.”, “조연아가 전합니다.”, “윤종혁입니다.”

 

이런 식이 세련되고 겸허하며 글로벌 트렌드에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쾨쾨한 인정 욕망을 내려놓고 담박하게 뉴스에 임하면 시청자도 환영할 터. 차제에 그 비장감 그득한 장엄서곡풍의 시그널 음악도 소박·담박해지면 좋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그토록 표나게 드러내야만 하는가. 되레 진부하고 식상하다. 모름지기 익숙한 것과의 결별 없이 진화와 발전은 난망한 법이다. 미니멀리즘과 스칸디나비아 노르딕 스타일이 각광 받듯 단순⸱간결의 가치와 미덕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다. 한중일의 동양적 친연성에 안주할 일이 아니다. K-컬처 당사국답게 앞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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