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황금빛 들판에 서서

기고/황금빛 들판에 서서

장 원 섭(세중옛돌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들판은 한햇동안 열심히 땀 흘린 농부들에게 풍요로움과 결실의 만족을 가져다준다. 우리에게도 이맘때가 되면 무언가 결실의 즐거움이나 희망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지켜보노라면 도대체 그럴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도의회가 개원하기도 전부터 자리싸움하는 걸 지켜보면서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생각나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온 나라가 수해 때문에 망연자실하여 한 사람의 일손, 한 푼의 구호성금이라도 절실한 마당에 도의원 전부가 교대로 외유에 나섰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아예 눈을 감아버린다. 명분이야 경기도에는 수해가 없어서 외국의 지방자치를 배우러 간다고 하지만, 한가하기 짝이 없는 생각도 그렇고 그 말을 그대로 믿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번에는 도지사가 지자체 문화 행사에 참석하면서 소방헬기를 이용했다고 해서 구설수에 올랐다. 경기도청 담당자는 소방헬기 사용에 관한 운영규칙을 들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운영규칙의 우선순위 7가지 중에서 담당자가 밝힌 순위는 맨 마지막인 7순위에 해당한다. 인명구조나 화재진압 등과 같은 공익사업에 우선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기시켜 놓아야 할 소방헬기를 굳이 사용하는 배짱도 또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 행정을 책임지는 사람이나 그 행정을 견제하는 기구인 의회나, 모두 상식 밖의 일들을 지극히 상식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 쯤 되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뽑아 놓은 사람들에게 정작 우리가 이렇게 무시당하고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모두가 도덕성과 가치관의 전도(顚倒)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서봉의 살림살이는 그 권세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가난했다. 거친 밥과 죽으로 연명하는 것은 물론이요, 양식이 없어 굶는 날도 많았다. 어느 날, 홍 대감의 부인이 여종을 시켜 제사음식으로 쓸 고기를 사오게 했는데, 사 온 고기를 보니 이미 상한 고기다. 부인은 아직도 그 푸줏간에 고기가 많이 남아 있더라는 말을 듣고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과 머리에 꽂은 비녀를 장에다 팔아 남아있는 고기를 다 사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마당 한구석을 파서 그 고기들을 다 묻어버렸다. 궁궐에서 돌아온 홍서봉이 그 연유를 물으니 부인이 “다른 사람들이 그 고기를 사먹고 혹시 탈이라도 나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여, 패물을 팔아 고기를 사와서 마당에 묻어 버렸습니다”라고 답했다.

홍서봉이 부인의 머리를 보니 비록 은비녀 대신 나무비녀가 꽂혀 있었지만, 세상에 그 보다 더 아름다운 비녀를 본 적이 없다고 적고 있다.

옛 어른들이 관직에 나아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거늘, 이제 우리는 도 행정의 집행과 감독에 대한 소임을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업무를 수행하면서 과연 홍 대감 부인과 같은 마음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고기만 팔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푸줏간 주인의 마음을 택할 것인가?

선거 때만 되면 온갖 장밋빛 공약들이 난무하지만 선거가 끝나고 당선자가 결정되고 나면, 우리는 그들의 공약을 믿은 것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한다는 것쯤은 알게 되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던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이제는 웬만한 충격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냉소적으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느 새 우리가 이렇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다.

이제 아침마다 신문을 펼치기도 겁이 나고 저녁마다 TV를 켜기도 식상하다. 앞으로 4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만족감을 느껴보고 싶다.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은 농부가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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