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성훈<시인>
산이 좋아 산에 가지만 실제로 산에서 머물러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풍드는 가을이면 한번의 나들이를 위하여 전국의 명산은 진통을 겪으며, 고속도로는 귀성길을 연상케 한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고생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전설을 안고 있는 산마다 그 깊이 만큼의 숨어 있는 비기(秘記)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일까. 가을이 깊어 갈수록 숨통 막히는 도시를 떠나 탈 일상의 세계에서 평화롭게 저물어 가는 자연을 경험하고 돌아온다.
아무튼 현대인들은 과학의 발달로 각종 공해오염과 무분별한 자연파괴로 낮아진 산소농도에다가 밀폐된 환경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탁한 공기와 저하된 습도로 두통, 현기증, 답답함 등을 호소하는 산소 결핍을 원인으로 하는 호흡기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산소는 식물의 푸른 잎에 지니고 있는 엽록소에 뿌리로부터 올라온 물과 공기중의 이산화탄소와 태양에너지를 합성하여 탄소동화작용을 하는 광합성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만들어지므로 산소 생산의 주역인 나무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울창한 숲을 간직한 산은 생명의 공급처인 셈이다.
하지만 산업화의 대기 오염은 도시를 덮어버렸고 늘상 공기 좋은 산과 바다에서 살 수 없으니, 산소 부족으로 착안해 낸 것이 산소 음료, 산소 발생기, 산소 캔, 산소 화장품 등 급속도로 상업화되면서 확산되고 있다. 결국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의 꼬리를 물고 생겨난 꼴이 된다. 이처럼 인류의 이익을 위하여 제기된 문제가 되레 문제가 되어 구원책을 강구하지만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지만 산은 어떠한가. 모든 것을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내어 주고도 바라지 않으며, 그 자리에서 철저하게 내면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그 속을 들여다보려고 오는 사람은 막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늘에 가장 맞닿아 있는 정상을 오르면서 산을 정복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산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인내와 한계를 극복한 것이니, 산을 정복하고 자연을 정복한다는 것조차도 인간의 오만이 가져다 준 언어유희일 뿐이다.
산은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태고 적부터 내려놓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멀리서 관망만 한다. 산을 오르다보면 나무, 숲, 바위, 새, 바람 등 산을 이루고 있는 일부를 만나며,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면 아무런 조건 없이 동화되어 자신도 모르게 산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산 속 깊이 들어갈수록 세속에서 벗어나 자연인이 되는 것이다. 산의 어디든지, 울창하고 험난한 가운데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는 산골짜기에는 물이 흐르고 있다. 사람은 그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쉬기도 하고 물을 마시기도 하고 계곡을 이용하여 건너가기도 하지만 산과 산 사이 경계가 되고 있는 물줄기 하나 건너지 못하여 반대편 산으로 이동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가 산이기도 하다. 바다도 마찬가지로 섬은 바다를 건널 수 없고 파도만이 망망 대해를 횡단하여 육지에 다다르고 있는 것을 보면 산에서 바다의 원리를 알게 된다.
나아가 인간, 산, 바다, 우주의 수식관계를 자세히 관찰하다가 보면 자연의 어느 것 하나, 삼라만상의 축소판이 아닌 것이 없듯이 인간이 돌아갈 자연을 통하여 삶의 원형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가을 산은 저물어 가는 한 생애를 온통 울긋불긋한 오색 단풍으로 물들이며 최후를 장식한다. 그러면서도 부피를 줄여가며 겨울을 준비하는 내실을 키운다. 우리는 인생을 완성하고 있는 가을 산을 보면서 무엇을 버릴 것인가.
무엇을 심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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