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프리즘/정의(正義)와 섭리(攝理)

빚을 진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5만원을 빚졌고 또 한사람은 500만원을 빚지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빚을 갚으려 해도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이 경우 만약 돈을 꿔준 사람이 이들의 빚을 모두 탕감시켜주었다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감사해 할까?”

아마도 많은 주의·주장이 나올 것이다.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라는 의견과 그 반대의 경우가 더 감사할 것이라는 주장, 또는 탕감 받은 금액의 다과(多寡)에 관계없이 다 똑같이 감사할 것이다, 심지어는 감사할 이유가 뭐가 있느냐는 등의 여러 가지 의견도 있을 수 있을 것이며, 또 이들은 모두 다 나름대로 그 주장의 근거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들의 여러 의견 중에는 옳은 의견이 아예 없을 수도 있으며, 또 만약에 옳은 의견이 있다면 나머지들은 모두 옳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 상대주의(相對主義)와 다원주의(多元主義)가 팽배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감사할 것이라는 의견이 옳다는 절대적 판단기준이 없다면 옳은 것에 대한 의미를 찾을 길이 없게 된다.

기업은 어떤 상황에서도 옳은 방법으로 이익을 많이 내야한다. 옳은 방법으로 이익을 내지 않을 때 결국은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물론 옳은 방법이 항상 이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라는 말은 의식 있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옳지 않은 이들이 길게 보면 결국 망하거나 잘 못되는 것을 듣고 목격하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악한 자의 흥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그들이 한때 흥하나 들풀처럼 삽시간에 시들고 푸성귀처럼 금방 스러진다”는 경구(警句)가 호소력 있게 들리는가 보다.

세상의 질서 중 하나는 정의(正義)와 통하는 인과법칙이다. 인과법칙이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음을, 또 어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 선행하는 원인이 있음을 일컫는다.

자연과학에서의 법칙들은 바로 자연계 내 질서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용어이다.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운동 제 3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Give = Take’ 의 정의질서를 표현한 것이며, 또 다른 ‘에너지·질량 불변의 법칙’도 결국은 정의의 속성을 기술한 것이라 할 것이다.

한편 제일 오래 된 성문법인 바빌로니아 시대의 함무라비(Hammurabi)법전의 ‘손에는 손으로(hand for hand)’, ‘이에는 이로(tooth for tooth)’, ‘눈에는 눈으로(eye for eye)’ 등도 정의의 개념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의 질서는 세상사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예컨대 인과응보(因果應報), 사필귀정(事必歸正),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 ‘뿌린 대로 거둔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것을 너도 남에게 해 주어라’,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 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주는 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등의 말들도 모두 정의의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들은 한결같이 더 많이 뿌린 이와 덜 뿌린 이가 똑같이 수확할 수 없음을 보여주며, 정의는 보편질서(普遍秩序)로서 결코 상대적이거나 상황에 따라 달리 판단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연계의 섭리(攝理)를 따르는 것이 곧 정의를 좇는 길이며, 결과(結果)의 평등(平等)은 정의의 섭리와 상충됨도 강하게 지적해 준다.

/김 인 호 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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