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년(숙종38) 청나라가 국경문제를 해결하자는 제의가 와서 백두산 동남방 4㎞, 해발 2,200m 지점에 정계비를 세웠다. 비문의 핵심내용은 西爲鴨綠, 東爲土門이다.
그뒤 19881년(고종18) 청나라는 간도 개척을 이유로 간도에 살던 조선인을 송환해 갈 것을 요구하여 왔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어윤중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그뒤 안변부사 이중하를 보내어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고, 대한제국 정부때인 1902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의 동포들을 직접 다스렸으나 청과 잦은 분쟁 때문에 1904년에 이범윤을 소환하고 말았다.
그러나 청은 언제나 우리와 간도 귀속(歸屬) 문제를 논할 때에는 토문강(土門江)~도문강(圖們江)~두만강(豆滿江)은 같은 발음임을 예시하여 동일한 강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에대해 우리측은 중국 전요지(全遼志)에도 토문강의 이름을 토문하(土門河)로 적고 있으며 송화강의 원류라고 밝혀놓고 있다고 강력히 항의했으나 듣지 않았다.
사실 토문강은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서북쪽으로 90리를 가야 나타난다. 우리는 흔히 이 지역을 간도(間島)라고 말한다.
간도란 원래 온성 일대의 두만강 사이에 있는 삼각주(사이섬)를 일컫는 말이었다. 청과 조선은 두만강 이북을 완충지대로 정하여 출입을 금하자, 쌀 한 두 되에 청인(淸人)에게 처자를 팔 정도로 가난하던 우리 동포들이 간도를 간다고 거짓말하고 간도를 건너서 만주지역까지 가서 개간을 하면서 비롯된 말로 다시 말하여 두만강 건너 땅까지 연장하여 간도로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간도가 중국 땅이 된 것은 1905년 9월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가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만주를 통째로 삼킬 목적으로 안봉선 철도부설권·무순 탄광 채굴권 등과 교환하였고,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일제의 손으로 백두산정계비를 뽑아 흔적조차 없애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과 혈맹국인 북한이 1962년 ‘조중변계조약’을 통해 중국과 ‘압록강~천지~두만강 홍토수’에 이르는 선을 비밀리에 국경으로 확정했다는데 있다. 남북이 통일될 경우, 북한의 국경조약을 당연히 승계해야 한다는 국제법의 규칙이 없으므로 통일 한국이 주변국과 국경문제를 다시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학자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주변 14개 나라와 국경을 접하여 끊임없이 국경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이 간도문제를 염두에 두고 동북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다.
간도문제를 염두에 둔 동북프로젝트의 진정한 속내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동북(간도)의 위상때문일 것이다. 중국은 동북의 고대사로부터 현대사까지 철저하게 중국사에 편입하여 장악함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한편, 북한이 붕괴되면 통일 한국이 간도의 귀속 문제를 들추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파제이다.
요컨대 이러한 중국의 분별없는 행동은 우리민족의 근본을 흔들고 뿌리를 건드리는 일이다. 간도는 고조선·고구려·발해의 활동무대였고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등 민족정신을 일깨운 항일무장 투쟁의 본거지이며 2백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 땅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사의 위기에 즈음하여 중국의 행동을 잘 간파하여 간도문제를 중국에 대한 ‘카드’로 이용하여 고구려사의 위기를 넘겨야겠다. 비록 고구려·발해의 옛 땅인 만주가 지금은 중국 땅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엄연한 사실의 역사까지 빼앗아간다는 것은 해도 너무하다.
/육광남 의정부 호원고 교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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