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우리 역사의 터, 독도

동해라는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 돌섬이 홀로 있다. 그래서 석도라고도 부르고, 독도라는 이름도 있다. 그 이전에는 武陵島 三峯島 子山島 干山島 라는 이름들이 있었다.

늘 그래왔지만, 또 다시 일본이 독도가 자기땅이라고 우겨댄다. 그러자 또 늘 그랫듯이 한국은 파르르 떨며 부산을 떤다. 마치 영유권 분쟁지역인 것처럼 변한다. 독도는 독도이다. 독도는 울릉도의 품안에 있고(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1~37번지), 울릉도는 우리의 삶이고 역사이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은 동해를 건너 일본열도에 도착했다. 고구려도 동해중부지역에서 출항하면 자연스럽게 200여 km 남짓한 이 해역을 거쳐 일본 혼슈의 곳곳에 도착했다. 울릉도와 독도는 망망대해의 동해를 건너는데 등대나 오아시스 역할을 했다.

고구려와 신라가 삼척 강릉지역을 놓고 전쟁을 벌이고,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점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해인들은 220년 동안 무려 34차례나 사신선을 파견했고, 746년에는 민간인들만 1100명이 건넌 적도 있었다. 호피 초피 웅피 인삼 꿀 명주 대모(거북껍질 술잔) 등을 수출하기 위해서다. 그들도 중기이후에는 울릉도 독도 해역을 경유하여 오키제도나 시마네현, 돗토리현, 후쿠이현 등에 도착했다. 수천 년 전부터 독도를 바라보면서 건너간 우리조상들이 개척한 터이다.

고려 시대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다이나믹한 삶의 터전이었고, 동해의 해적인 여진족들의 공격을 받아가면서도 지켜온 우리의 땅과 바다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바다를 천시하는 정책을 펴면서 조상들의 해양활동과 문화를 오랫동안 망각해 왔다.

울릉도는 물론 독도의 가치와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다가, 결국은 1905년 1월 28일, 일본각의가 독도를 일본령으로 편입할 것을 결의하게 방치하였다. 그 자그마한 빌미 때문에 이렇게 곤욕을 치르고, 자칫하다간 일본의 간계(奸計)대로 영토분쟁지역으로 오해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독도의 날’을 제정하는 시마네현의 마쓰에시 청사 앞에는 오래전부터 ‘독도여 돌아와라’ 라는 간판이 높게 서 있다.

1994년 유엔에서 신해양법이 발효된 이후에 EEZ( 200해리 배타적 경제적 수역)가 실효성을 지니고 바다는 실제영토가 되었다. 1996년에 EEZ를 선포한 일본은 세계에서 5위의 해양영토대국이고, 해군력은 세계 제 2위이다. 해양의 세기인 21세기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독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더구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전면적으로 재편되고, 지분확보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 역사와 삶의 터를 치욕스럽게 이유없이 또 한번 탈취 당할 순 없다.

동해로 들어가 독도를 돌아볼 때 마다 늘 여러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지만, 그래도 늘 한결같은 마음은 경외심이다. 이 너른 망망대해의 시공을 홀로 대하고 있는 그 존재감에 목이 메이고 무릎을 꿇고 싶어진다. 홀로 있는 존재는 외롭다. 늘 돌봐주고 관심을 쏟아주지 않으면 자의식이 강해도 서러움을 느끼고, 때로는 고까운 마음까지 든다.

/윤 명 철 한국해양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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