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셸 위 댄스

“78수는 꼼수였다.” 2019년 11월, 국수 이세돌이 은퇴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천상의 맛을 내는 기적의 사과가 있다. 주인공은 숲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10여년간 사과는 열리지 않았다. 초읽기에 몰린 그는 죽기 위해 산에 올랐다가 튼실한 도토리를 보고 깨달았다. 관리하지 않고 야생과 싸우게 했다. 몇 년 후 나무는 사과를 냈다. 기적의 사과다. 이세돌의 은퇴 인터뷰가 있기 3년 전인 2016년 3월, 인간과 인공지능(AI) 바둑기사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국이 있었다. 다섯 판을 싸워 네 판을 지고 한 판을 인간이 이겼다. 나는 AI가 네 판을 이긴 이유보다 한 판을 진 이유가 궁금했다. 인간의 모든 기보를 딥러닝한 AI를 상대했기 때문이다. 꼼수였다. 듣보잡 꼼수에 AI가 버퍼링을 했다. 블랙홀과 빅뱅의 양수겸장, ‘AI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다. 인간의 전장보다 더 치열하게 전개된다. 미래에 대한 우려도 비등한다. AI의 대부로 알려진 제프리 힌턴은 “AI가 두렵다”고 했다. 긍정과 부정의 성찰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AI 전국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AI를 이긴 이세돌의 꼼수와 생사를 도치시킨 기적의 사과를 가져온 이유다. 이세돌의 꼼수는 변수의 변종이다. 2023년, AI 바둑기사의 아킬레스는 선명해졌다. 번번이 인간의 꼼수에 버퍼링한다. 꼼수는 인간의 최종 병기다. 그것을 인간 세상에서 ‘신의 한 수’라 불렀다. 인류사의 중대한 변곡점에는 변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변수는 변증해 상수가 된다. 상수의 어미인 변수는 다름이다. 다름은 예술이 되고 일상이 돼 문화가 되고 문명이 되듯이 인류사의 기념비적 변수 AI는 거대한 문명으로 간다. 천상의 맛은 야생에서 나왔다. 야생이 사과나무에 잠자고 있던 본성을 깨웠다. 그 맛이 인간의 본성에 잠자고 있던 미감을 깨웠다. 초읽기가 인간의 본성에 있던 ‘신의 한 수’를 깨웠다. AI도, 꼼수도, 천상의 맛도,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있던 것들이다. 이는 빅뱅 이전에도 무언가 있어 우주가 창조된 것과 같은 이치다. AI는 빼어난 인간의 자식이다. 버퍼링을 당했던 꼼수도 단박에 상수로 만들고, 같은 수에 두 번 당하지 않는다. 인간은 상수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계속 꼼수를 생산한다. 2인 삼각 경기가 시작됐다. 합이 맞지 않으면 둘 다 쓰러진다. 인간도, AI도 알고 있다. 인간 본성에 잠자고 있는 포스트 AI를 깨울 때다. 그럼에도 AI의 썰(說)을 받아쓰기만 할 때 창조는 고사되고, AI의 노리개로 전락할 것이다. “문명이 모든 것을 가져갔다.” 2007년 10월, 뉴욕에서 만났던 마지막 남은 인디언 영적 리더의 통곡처럼 보호구역에서 이방인들이 제공한 먹거리에 취해 영혼을 상실한 인디언들의 아류, 아Q가 될 것이다. 1827년 무렵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건을 재현하는 사진술이 발명됐을 때 “회화는 죽었다”고 했다. 회화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사진으로 회화의 정체는 더 돈독해졌다. 1970년, 컬러TV 가 시판되기 시작할 무렵 “영화는 죽었다”고 했다. 영화의 미장센은 더 스펙터클해졌다. 지금, 상상을 초월한 디지털 해상력은 수억광년 우주를 장엄하게 재현한다. 불과 1년 전, 시빗거리였던 AI 그림은 해일처럼 볼거리를 생산하며 현대미술의 메카 뉴욕에서 ‘AI 아트(ART)’로 자리했다. 다름으로 차이는 분명해졌다. 그 다름의 총합이 AI다. 역설적으로 AI의 넘사벽은 불완전한, 그러나 창조적 존재, 인간이다. ‘AI 천하지대본’의 시대, 인간의 존재 이유는 절대한다.

[문화카페] 공연의 무대에서 장소로

얼마 전 서울 한강의 잠수교에서 럭셔리 패션 브랜드 루이비통의 초가을 컬렉션인 프리폴(prefall) 패션쇼가 열렸다. 이날의 공연을 위해 잠수교의 자전거도로는 어느새 약 800m 길이의 런웨이 무대로 변모해 있었고 차도는 패션쇼 관객들의 객석이 됐다. 24시간 내내 부근의 교통을 통제하고 진행할 만큼 대규모로 이뤄진 본 공연은 잠수교라는 특별한 장소에서 펼쳐졌기에 서울시민뿐만 아니라 유튜브로 생방송을 지켜보는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불과 이틀 전인 16일에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경복궁에서 럭셔리 패션 브랜드 구찌가 주최한 2024 구찌 크루즈 패션쇼가 성황리에 진행되기도 했다. 그간 세계적이자 독보적인 랜드마크에서 선보여온 구찌 크루즈 패션쇼는 2016년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회랑, 2017년에는 이탈리아 피렌체 피티궁전의 팔라티나 미술관, 2018년에는 프랑스 아를의 문화유산인 공동묘지 프롬나드 데 알리스캉, 2019년에는 이탈리아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과 카피톨리니 미술관 등 매년 역사성과 예술성 깊은 장소에서 진행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공연은 서울 경복궁의 근정문 및 근정전 행각에서 한국 전통 공간의 특수성을 살려 개최된 것으로 대내외적으로 의미가 깊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패션쇼 공연의 무대가 다양한 장소로 옮겨진 것처럼 현대 공연예술의 무대 역시 어떤 제약도 없는 무한대의 공간으로 그 지평을 넓혀 가고 있다. 교과서적으로 이해되던 연극의 4요소인 배우, 희곡, 관객 그리고 무대는 그 의미가 퇴색했고, 연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던 ‘무대’는 더 이상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 공연이 이뤄지는 공간이 무대라는 정형화된 공간을 넘어 무대 밖의 다양한 장소로 옮겨지기 시작하면서 관객들에게도 색다른 장소에서 즐기는 관극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장소-특정적 공연(site-specific performance)과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re) 같은 공연의 형태들이 바로 그러한 예시다. 장소-특정적 공연은 장소가 지닌 보이지 않는 상호관계를 전제로 어떤 장소에 대한 사건, 역사, 문화, 관습 등을 포함해 장소의 공간성과 물리적인 형태와 기능 등을 모두 포괄하는 공연이다. 공연이 이뤄지는 장소가 실외공간이라면 자연경관, 그리고 건축물과 어우러지는 환경에 초점이 맞춰진 공연의 분위기에 취할 수 있다. 또 공연이 이뤄지는 장소가 실내공간이라면 그 공간 사용의 기능적인 부분과 더불어 실내디자인과 조명 등 관객의 흥미를 끄는 요소들이 장소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관객 몰입형 공연’이라고 불리며 단어 자체에 ‘몰두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머시브 시어터는 기존의 연극과 비교하면 시공간과 감각이 크게 확장되고 그 어떤 요소보다도 관객이 우위에 서며 관객의 참여가 중심이 되는 공연 형태다. 관객은 스토리가 전개되는 방에, 비행기에, 혹은 병원에 스스로 위치해 공연자의 연기를 코앞에서 관람하거나 스스로 그 극의 한 요소로서 작용하며 관극하기도 한다. 따라서 관객이 보다 더 몰입하는 공연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공연의 무대를 실감이 나는 현장으로 꾸미거나 실제 현장을 무대화하는 것이다. 자연히 그에 따라 공연이 수행되는 장소의 중요성은 점점 커지게 됐다. 필자는 앞서 예로 설명한 패션쇼 공연들이 장소적 특수성으로 관객의 흥미를 강하게 유발한 것과 같이 무대가 실내공간에서 시작해 실외공간, 그리고 세계의 랜드마크나 주목될 만한 공간들로 점차적으로 확대되는 추세를 공연예술의 발전에 있어 매우 긍정적인 신호로 본다. 현대 공연예술에서 이처럼 무대에 대한 한계가 점점 사라지고 지속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은 미래의 공연이 나아가야 할 중요한 방향이기 때문이다.

[문화카페] 5월의 가족 이벤트

감사의 달, 가족의 달 오월이다. 자연이 소생하고 꽃과 나무들이 찬란하게 만발하는 5월이 가족의 달임은 참 적절하다. 기념일의 가치는 잊고 사는 이치를 일깨워 주는 데 있다. 이 눈부신 생명의 달에는 가족 간의 잊고 지냈던 소중한 존재 가치와 정을 몸소 나누는 일이 특별히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며칠 전 창작 뮤지컬 ‘신과 함께’ 공연을 마무리하며 새삼스럽게 그 필요성과 효과를 실감했다. 신과 함께는 주호민 작가의 유명한 웹툰이 원작이다. 과로에 시달리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소시민 직장인이 저승 변호사와 함께 7개의 지옥 관문을 통과하는 저승 이야기와 총기 사고로 억울하게 살해된 한 군인이 저승삼차사의 도움으로 이승에 남겨둔 어머니와 꿈에서 회포를 나누고 저승길로 떠나는 이승 이야기가 얽혀 있는 스토리다. 인간의 본질과 도의와 삶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교훈적인 내용인데 신과 함께의 저력은 그 당연한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15년 서울예술단에서 뮤지컬로 만들어 지금까지 꾸준히 공연하고 있고 2017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천만 영화의 대열에 섰다. 뮤지컬 신과 함께의 1막 마지막 장은 불효한 자식들을 얼음 속에 가두는 한빙지옥에서 주인공 김자홍이 이승에서 부모에게 쏟아부었던 사소한 투정과 반항이 얼마나 큰 죄인지 단죄를 당하는 장면이다. 결국 김자홍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눈물로 노래한다. 그 장면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관객이 상당히 많다. 그러면서 자식 낳아 보니 그 장면이 너무 생생히 아프게 와 닿는다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런데 보편적인 주제를 재미있게 전개한 작품 특성상 어린이 관객이 유난히 많은 뮤지컬 신과 함께 공연 내내 자식을 낳아 봐야 안다는 어른들의 예상과 달리 어린이 관객들의 반응이 가장 강렬했다. 지옥의 송제대왕이 알게 모르게 부모 가슴에 박은 못이 부모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를 노래하고 부모를 남기고 떠나야 하는 자식의 절규 어린 노래가 이어지는 내내 어린이 관객들은 예외 없이 모두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공연 후 저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스스로의 행동과 마음자세의 변화를 다짐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문화예술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뮤지컬 ‘영웅’ 관람 후 한 청소년의 다짐도 떠오른다. 뮤지컬 영웅 의 대표적인 넘버인 ‘장부가’는 안중근 의사의 신념과 소명의식이 잘 담긴 마지막 독백과도 같은 노래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해 본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 꿈 이루도록. 하늘이시여, 지켜주소서. 우리 뜻 이루도록.” 법정에서 일본의 대역죄를 열거하며 일본과 전쟁 중이고 본인은 전쟁포로라고 외쳤던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다하기 직전 결연하게 불렀던 뮤지컬 속 외침이다. 그 청소년은 공연 후 흥분해서 목표의식도 꿈도 없던 자신이 구체적인 미래를 계획하고 다짐하게 됐다고 벅찬 감정을 감추지 않았는데 그 모습을 보며 한 편의 공연이 한 사람의 나침반이 될 수 있구나 확신을 가졌다. 가족의 달에 가족과 함께 평소와는 다른 일탈을 계획해 보기를 권한다. 가족 간의 도리, 삶의 가치관과 도덕의식을 훈계처럼 주입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와 함께 공연과 영화 전시 관람을 하고 계절 따라 바뀌는 자연의 순리를 함께 체험하며 말보다 더 강한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삶의 방향을 되새기도록 5월의 가족 이벤트를 즐겨 보면 어떨까.

[문화카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진화의 속내는 매우 심플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심해에 사는 울트라블랙피시는 반사율이 제로에 가까운 0.05%라 했다. 태양빛은 닿지 않지만 자체 발광하는 물고기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스스로 흑화했다. 있어도 없듯이 존재감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 선(禪)의 절정이다. 반사율 제로가 그 지점이다. 어떻게 거기로 갈 것인가? 아용아법(我用我法), 내 법을 만들었다. 선(禪)을 정점으로 구르지예프를 비롯한 여러 선각자의 사상을 더듬질했다. 키질하고 체질했다. ‘대화(對話)’가 남았다. 핵심은 사물과의 대화다. 인간이 대화의 주인은 아니다. 소통을 우선하는 인간의 대화는 서로 상처받지 않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비즈니스와 같다. 대화의 본질은 소통이 아니라 창조다. 오랜 시간 탐미했다. 관념을 해체하는 과정을 대략 7단계로 세분해 내 수행의 근간으로 삼았다. 데이비드 봄은 이론물리학의 거장이자 양자역학의 태두다. 우주 질서 이론과 철학과 심리학과 부디즘을 아울러 문리(文理)가 트인 사람이다. 봄은 “레이저의 에너지가 강력한 이유는 주변을 간섭하는 레이저의 성질, 즉 ‘빛의 간섭성’ 때문”이라 했다. 공감한다. 대화는 사유와 유사하지만 대상 혹은 화두와 직접 관계해 관조하고 몰입해 관념을 해체한다. 관념이 무엇인가? 체화된 나의 모든 것이다. 대상과 내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바라보는 ‘관조의 서정’이 태양빛의 비간섭성과 부합하지만 젠틀한 ‘관조’만으로 찰거머리 같은 관념이 해체되지 않는다. 서로 간섭해 강력한 에너지를 내는 레이저의 물리적 성질과 같이 대상에 몰입해야 너(他)도 없고, 나(我)도 없는 양망(兩亡)에 이른다. 나와 대상의 관념이 소멸해야 그 공간에 새것이 밀려 든다. 이 순간이 몰입의 완성이자 해체의 완성이다. 몰입의 완성은 몰입의 완전한 죽음, 열반이다. 하지만 관념의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썩은 제 의식을 먹게 되고 평생 자기복제를 하게 된다. 대화의 프로세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의지(意志)’다. 나는 봄이 언급한 레이저의 ‘간섭성’을 ‘의지’로 해석한다. 관념은 끊임없이 타협하고 합리화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렇게 어렵지만 파부침주의 ‘의지’로 기투하면 어느 봄날, 꽃처럼 찬란한 값을 내어 놓는다. 대화의 프로세스는 이토록 모질고 드라마틱하다. 내 모든 작업의 서사다. 내 작품 중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작품이 있다. 그 작품 앞에 설 때마다 나를 여민다. 호흡이 운다. 여럿이 울었다. 꺼이꺼이, 한참을 통곡한 사람이 있었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나를 놓아 버린 절체절명의 시간이 있었다. 살기 위해 도망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 더 깊은 세계로 갔다. 이때가 대화의 절정, 크리티컬 매스다. 그 위치에서 내 손을 잡아줬다. 검고 검었다. 검정 위에 검정했다. ‘검은 산’이다. 그 산을 쌓기 위해 울트라블랙 피시처럼 반사율이 제로인 오일을 찾아 세상을 뒤졌다. 검고 검은 것은 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사율 제로는 색이 아니다. 색 아님을 칠하고 싶었다. 색은 빛의 파장이다. 파장이 없는 세상을 재현하고 싶었지만 그런 오일은 없었다. 스펙트럼이 없는 세상, 그곳이 어디일까? 내가 잉태된 곳, 어미(母)의 방이다. 나의 근본이다. 사람의 근본이다. ‘울트라블랙피시’, ‘레이저’, ‘검은 산’,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대화의 현현(顯現)이다. 나는 인간 구루(Guru)를 신봉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이 나의 파트너다. 나의 구루다. 참으로 다행스럽다. ‘검은 산’은 그림이 아니다. 검고 검은 세계다. 두 손을 모으는 세계다.

[문화카페] ‘리버티뉴스’에 담긴 영화사적 의의와 중요성

과거에 ‘뉴스영화(newsreel)’라는 것이 있었다. 여러 개의 단편 뉴스 영상물들로 이뤄진 러닝타임 10분 내외의 독립된 콘텐츠를 지칭하는데 영문명에 반영돼 있듯 그 자체가 필름 시대의 산물이었다고 할 만하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일반명사보다도 ‘대한뉴스’라는 이름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 40대 중후반 이상의 연령대라면 극장에서 한번쯤은 ‘대한뉴스’를 접해봤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 바탕에는 1963년부터 1995년까지 영화법에 명기되어 있던 뉴스영화와 문화영화의 의무상영 제도가 자리한다. ‘대한뉴스’의 역사는 꽤 길며 분량 역시 상당하다. 1953년부터 1994년까지 40년 넘게 거의 매주 완성돼 총 2040호가 쌓이게 된 것이다. 제작은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6월22일 설립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맡았으며, 이전까지는 그 전신인 공보국 영화과 산하의 대한영화사에서 담당해 왔다. 그렇다고 한국 뉴스영화의 역사가 대한뉴스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니다. 비록 식민지 시기였으나 1941년에 ‘조선뉴스’가, 1942년부터 ‘조선시보’가 제작된 바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보’는 해방 이후에도 뉴스영화명으로 사용돼 ‘대한전진보’를 거쳐 ‘대한뉴스’로 이어지기도 했다. 1952년 5월19일부터 1967년 6월1일까지 모두 721호가 발행된 ‘리버티뉴스(Liberty News)’의 존재성도 간과할 수 없다. 이 15년 사이에는 ‘리버티뉴스’가 ‘대한뉴스’에 버금가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그렇다. 다만 그 제작 기구가 주한 미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USIS)이었으므로, 이를 온전한 한국 뉴스영화로 보기에는 한계 지점이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촬영, 편집, 녹음, 음악, 현상 등 다수의 기술 인력이 한국인이었고 내용의 절반 이상이 국내 소식으로 편성됐으며 내레이션이 한국어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리버티뉴스는 커다란 영화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를 통해 전후(戰後)의 척박한 여건 하에서도 영화인이 양성되고 영화 제작 여건이 마련되며 대중들의 지적 호기심이 충족돼 갔다는 사실 또한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와 관련해 반가운 일이 하나 생겼다. KTV국민방송에서 ‘한미동맹 70주년 새로 보는 리버티뉴스’를 20부작으로 기획해 4월3일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6시50분부터 10분간 방영하게 된 것이다.   ‘리버티뉴스의 탄생과 임시수도 부산’이라는 제목의 첫 방송을 통해서는 리버티뉴스의 제작 배경 및 대중 영사 광경, 그리고 피란 시절 부산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와 문화 이벤트의 모습이 다채롭게 소개됐다. 이를 위해 부산시 첫 시의회 개최 소식 등을 전하는 리버티뉴스 1호 화면 및 리버티뉴스를 다룬 문화영화나 대한뉴스 등의 영상 자료에 더해 리버티뉴스의 황의순 전 프로듀서와 ‘천일의 수도, 부산’의 저자 김동현 칼럼리스트의 인터뷰 장면이 삽입됐고, 여기에 적절한 자막 설명도 첨가됐다. 이로 인해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마치 완성도 높은 짧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4월10일 방영된 2회차에서는 경무대, 창경원, 남산 등지를 중심으로 1950년대 후반 서울의 풍경이 전시됐다. 이번 주에 공개된 3회차의 경우, 1953년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전후의 과정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이후에도 KTV에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충무공 이순신, 수출품의 변천, 가정의 달 행사, 대학가 축제 등 다양한 주제로 리버티뉴스에 기록된 1950, 60년대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문화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리버티뉴스의 필름은 오랫동안 유실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2010년대 들어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역사영상융합연구팀에 의해 미국의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이 소장하고 있던 624편 전량에 대한 수집이 이뤄졌다. 하지만 미보존 영상물이 여전히 적지 않을 뿐더러 확보된 자료의 대부분이 사운드와 자막 처리를 거치지 않은 상태여서, 해당 정보를 정확하고 상세하게 파악하는 데 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2월21일 KTV가 ㈜맥스교육의 박영배 대표로부터 신규 발굴 영상물 58편과 오디오 복원본 220편이 포함된 리버티뉴스 9~350호(1953.6~1960.10) 자료를 기증받았다. 곧이어 리버티뉴스 관련 프로그램이 기획된 것이다. KTV는 과거 ‘대한뉴스’를 생산·보급하던 국립영화제작소의 후신이다. 이에, 여기서는 22호부터 2040호까지 총 1만2천804건에 달하는 구성 영상물을 관리하며 온라인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뉴스 필름은 1953년 6월 이전, 즉 1호부터 21호까지의 분량이 현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 뉴스영화가 새롭게 출발한 6·25전쟁기와 그 이후의 시대 상황과 생활상, 사회 분위기와 삶의 양상들을 살펴보려는 과정에서 뉴스영화에 부여된 사료적 가치와 더불어 리버티뉴스의 영화사적 중요성은 재차 부각될 공산이 크다. KTV의 이번 프로그램을 계기로 보다 많은 이들이 리버티뉴스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카페] 지극히 ‘실험적’이란

동시대 공연 작품에 있어 ‘실험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실제로 많은 예술가가 창작에 앞서 이 실험적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모습을 많이 봐 왔고 필자 역시 항상 그 지점에 대한 고민이 있다. 창작된 작품이 관객들로 하여금 창의적이고 새롭게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실 공연예술에서 실험적인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는 등호가 성립된 시기는 2500년이라는 공연예술의 긴 역사를 놓고 봤을 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필자는 그 시발점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유럽 국가들에서 일었던 개혁인 아방가르드 연극 운동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후 1960년대부터 세계 공연의 발달에 영향을 미쳤던 네오 아방가르드 연극 운동에서 극대화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그와 맞물려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이르러 공연예술의 변화와 다양성의 시도가 확장됐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작 ‘햄릿’으로 세계 공연계는 무수히 많은 햄릿의 모습을 재탄생시켰다. 오히려 작품 ‘햄릿’을 희곡 그대로 공연하는 것이 훨씬 더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이처럼 동시대 공연예술은 몇 차례의 혁신과 다양한 매체와의 협업 등을 통해 새롭게 거듭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햄릿’의 수많은 레퍼토리 작품들보다 희곡 그대로 공연하는 ‘햄릿’이 더 실험적이라고 앞서 언급한 바와 비슷한 맥락에서 무대나 조명, 의상 등 장치에 대한 의존도를 상당히 낮추고 오롯이 창작적 내러티브와 그에 상응하는 움직임에 집중한 한 현대무용 작품이 새로운 느낌으로 필자를 자극했다. ‘Alone, naturally’는 작년 마곡으로 이전한 LG아트센터의 블랙박스 극장인 유플러스(U+)스테이지에서 2023년 3월에 공연된 현대무용가 김나이의 새로운 안무작이다. 텅 빈 무대의 댄스플로어에 덩그러니 누워 있는 한 사람. 수미상관(首尾相關) 구조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현대인으로 삶을 살아가는 홀로 된 인간군상을 대변하는 듯 공허한 느낌을 준다. 특히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직면한 동시대 인물들을 형상화한 모습에서 객석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첫 장면 이후 9명의 무용수가 등장해 각자의 속도로 무대의 하수에서 상수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그들의 움직임은 목적이 없으면서도 한편으로 무겁다. 이따금 뒤로 걷는 무용수도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반복의 시퀀스를 거치면서도 그들이 동작 그대로 엎어져 누워 있는 모습일 때 무대가 한결 안정적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무용수들 제각각의 불안한 시선들 속에서 관객으로서 안도감이 느껴지는 그들의 움직임이 바로 누워 있는 자세라는 것이 몇 번이고 와 닿았을 때 이 공연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으로서의 외로움과 변질된 공동체의 의미들이 피부로 느껴졌다. 현대무용은 동시대성이 강한 예술이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며 자연스레 동시대성이 요구되는 장치들이 많이 사용된다. 그런데 작품의 주제를 더욱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공연 장치와 같은 외연에 집착하지 않고 움직임만으로 관객에게 공감되는 내러티브로 구성된 본 작품 ‘Alone, naturally’가 오히려 지극히 실험적인 형태의 새로운 작품이었다고 강조하고 싶다.

[문화카페] 역사를 바꾸는 의기투합

젊은이의 열정적이고 신선한 의기투합은 때로 그들의 삶뿐만 아니라 한 분야의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1964년 미국의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한 작품에 출연한 제임스 라도와 제롬 라그니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학교에서 쫓겨 난 학생의 사연이 실린 신문기사를 보고 함께 위험한 도전을 시도했다. 거리에서 캐스팅 된 히피족 배우들이 반전과 자유를 부르짖으며 무대 위에서 나체로 욕설도 불사하는 뮤지컬을 만든 것이다. 뮤지컬 ‘HAIR’ 이야기다. 게다가 그 뮤지컬을 담는 그릇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록 음악이었고 배우 중 3분의 1이 흑인이었다. 보헤미안들의 그 발칙한 상상력은 너무 파격적이어서 자칫 묻혀질 수도 있었는데 혁신적인 공연 프로듀서 조지프 팝이 퍼블릭시어터의 개관작으로 과감히 올려 세계 뮤지컬 역사에 큰 파장을 일으키는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 뮤지컬 ‘HAIR’는 미국 라마마극단 실험 연극의 대표주자인 톰 호건이 연출로 합류하면서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된다. 1969년 토니상 작품상과 연출상을 받고 브로드웨이 장기 공연에 전 세계를 투어하고 2009년 리바이벌 버전은 토니상 7개 부문 수상에 아카데미 라이선스 건수가 가장 많은 작품 중 하나로 장수하게 된 것이다. 라도와 라그니는 알았을까? 그들의 자유롭고 개척적인 상상력이 뮤지컬 역사에 큰 방점을 찍으리라는 것을. 실험적인 극작가 스티븐 세이터는 얼터너티브 록 싱어송 라이터인 던컨 셰이크에게 뮤지컬을 함께 만들자고 제안했다. 셰이크는 뮤지컬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했고 세이터는 그냥 너의 음악을 하라고 했고 셰이크는 인간의 삶을 요동치게 해보고 싶다고 답했다. 그래서 탄생한 충격적인 뮤지컬이 ‘스프링 어웨이크닝’이다. 청소년들의 낙태, 동성애, 자살 등을 다룬 소재에서부터 주제를 향한 정면 돌진, 낯설고 창의적인 연출과 안무, 강렬한 록 음악 등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스프링 어웨이크닝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유명한 말을 낳는다. 뮤지컬은 철저한 협업의 산물이다. 한국은 젊은 뮤지컬 창작자들에게 행복한 창작의 산실이다. 신진 창작자들이 팀을 이뤄 도전할 수 있는 정부의 지원 제도와 민간의 지원 사업이 체계적이고 또 많다. 이 지원 사업을 통해 제작된 창작 뮤지컬들이 끊임없이 중국과 일본, 또 대만으로 라이선스 수출되고 있다. 역사는 자유로운 도전으로 기존의 가치를 다르게 탐험하는 창조적인 개척에 의해 끝없이 바뀌어 왔다. 세계적으로 장수할 수 있는 창작뮤지컬을 잉태하는 새로운 창작 협업 파트너들이 더 많아지길, 그리고 그들의 파격적인 창작이 한국 뮤지컬 시장의 지형을 바꾸기를, 또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지닌 프로듀서들과 비평가, 정책전문가들이 그 파격성에 힘을 실어주기를. 그래서 이제는 희망이 아니라 확신이 되고 있는 세계 뮤지컬 시장 3위의 역사가 앞당겨지기를.

[문화카페] 자연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미국 시카고 예술대(SAIC) 미대 교수이자 비평가인 마리 제인이 나에게 물었다. 자연 드로잉 프로젝트 ‘자연하다’다.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와 요시밀로 갤러리의 동시 개인전과 뉴욕타임스 리뷰에 이은 빌 게이츠의 컬렉션은 뉴욕의 화두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더 깊은 곳으로 갔다. 2007년 인도의 올드델리를 촬영한 만 컷의 사진을 포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잿빛이 됐다. 수백 편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듯 카오스의 상징처럼 느껴지던 델리는 선정에 들었다. 장엄해서 울었다. 허망해서 웃었다. 뉴욕을 촬영한 만 컷의 사진을 포갰다. 당당해서 오만하던 뉴욕은 사라졌다. 그렇게 울고 웃으며 로마, 파리, 프라하, 베를린, 도쿄, 아테네, 런던, 모스크바, 워싱턴DC, 베네치아 등 인간 등정의 발자취를 따라 12개 도시를 주유했다. 도시마다 만 컷의 사진을 포개 단 한 점의 작품을 생산했다. 수많은 정체가 엄존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회색의 모노톤이 됐다. 긴 여정 끝에 자연이 있었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왔다. 2010년 숲속에 하얀 캔버스를 세웠다. 세계시장이 형성된 작업을 계속하지 않고 새 프로젝트를 하는 것은 자살행위라 했지만 의식의 진화를 박제하지 않았다. 내 파격과 내 혁명과 내 의지를 우선해온 나의 자연을 따랐다. 숲의 캔버스는 선 채로 두 해 동안 두 번의 장마와 여섯 번의 태풍과 마주했다. 캔버스는 한 치도 비켜 가지 않고 자연의 절기 따라 때로는 비통하고 때로는 서정적으로 자연과 교감했다. 인도 부다가야에 2년을 서 있었던 캔버스를 만나는 순간, 청년 싯다르타가 붓다가 된 이유를 알았다. 참혹했다. 캔버스의 겉과 속은 가혹한 환경에 노출돼 큰 상처를 입었다. 뉴멕시코, 인디언들이 살았던 땅에 선 캔버스는 미니멀의 극치였다. 맑고 깨끗했다. 늑대와 함께 춤을 출 줄 알았던 인디언, 그들의 영혼이 맑은 이유다. 아타카마사막, 티베트, 시베리아, 야생화가 지천인 곳, 인류 문명이 시작된 곳, 카르마가 산처럼 쌓인 곳, 땅속, 바닷속에 생캔버스를 세웠다. 그곳에서 붓다가 되고, 생명이 되고, 문명이 태동했다면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철학과 사상, 문명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환경이다. 스스로 그러해서 자연이라 하지만 자연은 기운이 생동하는 동사로 실존한다. 모든 존재를 경외하고 경배해야 할 이유다. 숲의 캔버스는 감동이다. 하지만 제 살 속 깊이 죽음을 새겨야 한다. 이는 미술사에서 산 채로 색을 받는 캔버스의 존재 이유와 차별된다. 아서 단토는 ‘무엇이 예술인가?’에서 “캔버스는 그림을 받쳐 주기만 한다. 사물의 일부이지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다. 이는 서양 미학과 동양 미학의 변별이 아니라 자연과 사물에 대한 사유의 부재다. 수묵화에서 발묵은 사물인 종이의 철학이다. 종이를 소외시키고 의미를 생산할 수 없다. 인간의 몸에서 뼈와 살을 분리할 수 없고, 몸과 정신을 분리할 수 없다. 캔버스는 사물과 의미를 동시(同時)한다. 포 사격장의 타깃에 캔버스를 세웠다. 허가 과정에서부터 실행하기까지 몇 해를 넘겼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 절절했지만 폭력으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를 제외하고 자연을 완성할 수 없었다. 비산하는 포탄 파편에 산산조각 난 캔버스 조각을 수습해 패치워크했다. 세상을 덮을 현(玄)의 산을 만들었다. 예술사에 없었던 일, 포가 그린 그림이다. 썩은 물은 생명이 될 수 없지만 배를 띄우는 부력은 같듯이 갈등과 야만의 역사도 인간의 역사다. “눈물이 난다. 아타 선생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계시다.” 이어령 선생의 덕담은 태산 같은 죽비가 돼 양 어깨에 앉았다.

[문화카페] 인공지능 예술가

인간 본원의 영역인 예술에 있어서 인공지능이 ‘창조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미 챗GPT 이전부터 이뤄져 왔으며 그 답이 ‘가능하다’임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파르마코-AI’는 인간 작가 K 알라도맥다월과 인공지능 작가 GTP-3가 공동으로 저술해 2022년에 출간한 책이다. GTP-3는 개발사인 오픈에이아이(Open AI)에 의해 2020년에 태어난 인공 신경망 언어 모델이다. 파르마코-AI는 이 둘 사이에서 2주간 전개된 다양하고 실험적 대화들이 엮인 책으로 주로 시, 수필, 이야기같이 동시대에서 예술가, 예술창작의 의미와 더불어 자연과 기술, 문명에 대한 담론으로 구성돼 있다. 타 분야에서의 사례들보다 예술현장에서 인공지능의 역할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창조의 영역에서의 인공지능의 역할’은 우리가 염두에 두지 못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파르마코-AI를 읽으며 느낀 점은 실제로 인간 작가가 전체적인 구성을 끌고 가는 방식으로 창작이 이뤄지긴 했지만 인공지능 작가의 글솜씨가 너무나 유려하고 놀라우리만큼 신선하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도중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했다. 지금 이렇게 필자가 쓰고 있는 칼럼도 지금 당장 인공지능 작가가 쓴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파르마코-A뿐만 아니다. 최근 국내에서 개최된 프랑스의 디지털 미디어 예술가 미구엘 슈발리에의 ‘디지털 뷰티’ 전시에서는 드로잉 로봇이 그림을 그린다든지 얼굴 인식 기능 감시 카메라로 관객의 초상화를 실시간으로 그리는 등 인공지능의 적극적인 활용을 볼 수 있다. 기존에도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전시가 있었지만 이번 전시는 그야말로 디지털 전시가 중심이 돼 펼쳐지며 그 기술들도 굉장히 놀라운 수준으로 발표됐다. 바야흐로 인공지능 작가의 예술적 창의성이 인간 못지않게 빛나는 시대에 돌입했다.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정보의 해방감은 인간의 삶과 지식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많은 것들이 인간을 대신하고 결국 인간이 퇴화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 특히 활동무대가 좁기로 유명한 직업인 예술가란 영역의 인공 지능 침범은 더욱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의 현장에서 파르마코-AI의 출간은 시발점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의 선전이 두드러지는 현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이는 단순히 인간 작가를 대신하거나 언젠가 뛰어넘을지 모르는 인공지능을 찬양해야 할 것인가, 경계해야 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좀 더 냉정한 자세로 인공지능의 협력을 필연적이고 불가역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 예술가와의 공존에 대해 고민해야 할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또 답을 발견할 것이다. 무수한 담론 끝에 캔이나 변기 따위의 물건조차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듯 신의 창조물인 인간의 역할은 예술 영역에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문화카페] 고화질로 다시 찾아온 ‘TV문학관’

강추위와 고물가로 유난히 춥게 느껴졌던 올겨울도 어느덧 지나가고 3월 들어 따스한 햇살이 온화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봄을 알리는 신호는 무수히 많지만 방송가에서는 흔히 프로그램 개편을 통해 계절의 바뀜을 인지시키곤 한다. 그런데 이번 봄 편성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바로 KBS2 TV에서 5일부터 매주 일요일 밤 12시25분에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20부작이 방영 중이라는 점이다. 방송 첫 작품은 김진욱 극본, 이유황 연출로 만들어져 1982년 4월17일 전파를 탄 바 있는 ‘산골 나그네’였다. 원작은 1930년대에 발표된 김유정의 동명 단편소설로, 풍부한 어휘와 토속적 분위기 등 그의 문학적 특징이 화면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또 1980년대 당시 최고 스타였던 정윤희를 비롯해 사미자, 김성환, 김순철 등 유명 배우들의 젊은 시절 모습이 4K 초고화질(Ultra High-Definition) 영상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TV문학관은 공영방송 KBS가 1980년 12월1일 개막된 컬러 방송 시대에 발맞춰 야심차게 내놓은 1980년대의 대표적인 텔레비전 드라마 프로그램이었다. 연속극 및 시리즈 형식을 지니지 않는 독립된 작품들이 회차별로 제작됐는데 문학작품이나 창작 서사물의 스토리 라인과 컬러 필름 위에 구현된 영상 미학이 어우러지면서 차별성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1980년 12월18일 ‘을화’가 전파를 탄 이래 1987년 11월7일 방송된 ‘가을비’까지 7년 동안 총 266편이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후 TV문학관은 약간의 개명이 가해진 채 여러 번 부활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간헐적이거나 단발적인 기획에 그치고 말았다. 1980년대 TV문학관의 인기 비결은 각각의 작품이 마치 ‘영화’처럼 완결성을 띰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했다는 데서 찾을 만하다. 이로 인해 각 가정의 텔레비전 수상기가 비로소 ‘안방극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 영화가 가지고 있던 독립된 매체성은 상당히 모호해졌으며 매스미디어로서의 텔레비전의 위상도 현격히 떨어진 상태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큰 요인으로는 테크놀로지 발달에 따른 다매체 디지털화를 지목할 수 있다. 물론 기술의 발전이 영상 콘텐츠의 제작과 유통에 미치는 영향은 다대하며, 여기에는 수준 높은 기술력이 동원돼 과거에 대한 재현 범주가 넓어지고 이러한 과정에서 생성되는 노스탤지어의 강도가 세졌다는 점도 포함된다. 공사 창립 50주년을 맞이해 ‘영상복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KBS가 다시 내놓는 20편의 TV문학관 ‘명작’들 역시 과거 촬영된 35mm 필름에 대한 고도의 디지털 복원 작업을 거쳐 ‘재탄생’한 것들이다. 기존의 작품성과 신기술이 결합된 만큼 ‘열녀문’, ‘장마’, ‘갯마을’, ‘봄봄’, ‘분례기’, ‘카인의 후예’ 등의 향후 방영분들은 더욱 강렬해질 봄기운을 받아 시청자들의 보다 뜨거운 반응을 얻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문화카페] 포스트 코로나의 첫 번째 봄

어김없이 봄이 오고 있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로 오염된 답답하고 어두운 시간을 지나 맞이하는 봄이라 더욱 귀하다. 끝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회생 능력은 우리에게 실증적인 희망의 메시지다. 몇 년 전, 소박한 야외 콘서트를 제작 기획한 적이 있다. 잔디 정원에 피아노 한 대 얹고 초록빛 나무들 가지에 촛불을 밝히고 마당 곳곳에 크고 작은 촛대로 자연 조명을 만들고 관객들에게도 향초를 나눠 줘 해질녘 촛불을 밝히며 다 함께 노래도 불렀다. 청명한 하늘에 그날 따라 무지개가 뜨고 새는 날고 오후 햇살은 따사롭고 그러다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또 밤을 맞으며 4시간 동안의 콘서트는 마무리됐다. 자연과 무척 어울리는 목소리의 임태경 콘서트라 더 감미로웠지만 자연 풍경 속에 놓인 관객 한 명 한 명이 다 예술적인 오브제였다. ‘TK SOUL THERAPY’ 콘서트라는 이름처럼 그날의 관객들은 콘서트를 즐기는 것 이상의 정서적인 감흥을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하며 창조 작업의 동반자가 돼 줬다. 아이슬란드를 상징하는 록 밴드 시규어 로스(Sigur Ros)는 그들이 만든 희망어로 노래한다. 그들의 무대는 아이슬란드 계곡, 들판, 어디든지 자연 그 자체이고 그들이 야외 콘서트를 통해 전하는 대자연의 소리와 풍경은 언어와 멜로디 이상의 감동으로 그들의 음악을 완성시킨다. 한국의 전통 연희를 지탱해 오던 마당의 멍석문화는 또 다른 공연 창조의 장이었다. 우리 연극의 뿌리인 굿은 열린 마당을 무대 삼아 관객과 함께 어우러진 총체 예술로 방방곡곡 공동의 희로애락을 달랬다. 오래 전 슬로바키아 구 시가지를 산책하다가 발견한 골목 어귀에 놓인 피아노 한 대와 그 피아노를 자유롭게 연주하던 소녀, 프라하 거리에서 만난 줄 인형 연주가 뛰어났던 원로 거리 예술가와 그 연주에 맞춰 춤추던 노부부는 내 여행의 사진첩에 영원히 자유로운 행복감으로 간직돼 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의 고통을 거치면서 많은 무대가 사라졌다. 공연장은 물론이고 야외 공연장까지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지난 3년간 관객들은 공연장을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만나는 꿈의 공간으로 여기지 않게 됐고,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피했다. 그런데 더 이상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쓰지 않고 싱그러운 봄을 맞이하게 됐다. 자연이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땅을 뚫고, 두터운 가지를 뚫고 새 생명을 잠 깨우듯이 우리도 스스로 도전적으로 자가 치유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의 문턱에서 맞이하는 이 봄은 문화예술 종사자들에게도, 관객들에게도 또 새로운 혁신적인 계기라고 본다. 공연장을 멈추게 했던 코로나는 랜선 콘서트를 활성화시켰고 연극과 뮤지컬의 온라인 상영을 일상화시켰다. 새로운 공연장을 탄생시켜 준 것이다. 그리고 공연장을 넘어서는 새로운 광장들이 새로운 공연을 창조해 줄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 야외 공연을 통해 느꼈던 일탈의 행복감을 이 봄에는 꼭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 본다.

[문화카페]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

“물하고 비는 무엇이 다릅니까?” 스태프가 나에게 물었다. 한 무리의 백조가 호수를 캔버스 삼아 액션페인팅을 하듯 유유하다. 뉴욕 센트럴파크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에 가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듬해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에서 예정된 전시 작품 제작에 집중하고 있었다. 6년간 심의 끝에 뉴욕 ICP에서 개인전이 결정된 , 세계 사진계의 전설적인 큐레이터 크리스토퍼 필립스와의 오랜 대화 끝에 동양 사상을 예술로 승화시킨 프로젝트를 선보이기로 했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존재와 비존재를 극적으로 대비시켜 ‘없음으로 실존’하는 사유와 성찰의 화두였다.  뉴욕은 거대한 오픈세트장이다. 인간의 시지각을 초월하는 8x10인치의 대형 뷰카메라로 뉴욕과 심도있는 대화를 했다. 대화는 관념을 해체하고 새로움을 창조한다. 새로움, 그것이 대화의 본질이다. 한 컷의 필름에 8시간 동안 셔터를 열어 움직이는 것은 속도에 비례해 사라지게 했다. 미국 근대 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의 대표작 ‘5번가’를 비롯해 브로드웨이와 타임스스퀘어 등 수많은 자동차와 인파는 사라졌다. 도시는 선정에 든 듯 침묵했다. 21세기 도시의 아이콘 뉴욕이 묵시론적 배경이 됐다. “오! 마이 뉴욕.” 2006년 6월 많은 뉴요커가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이유다. ICP 전시와 동시에 요시밀로 갤러리에서는 박물관처럼 동시대 인간상을 유리 상자에 설치했던 ‘뮤지엄 프로젝트’를 전시했다. 뉴욕의 메이저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동시에 개인전을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뉴욕타임스는 프리뷰에 이어 아츠섹션 두 페이지를 썼다. 뉴욕타임스 리뷰 다음 날, 빌 게이츠가 작품을 컬렉션했다. 생을 담보했던 나의 예술철학이 뉴욕의 화두가 됐다. 하지만 나는 뉴욕의 신화에 안주하지 않고 더 깊은 세계로 갔다. 나를 혁명하고, 나를 파격했다. 세계 사진의 역사를 생산하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무명의 아시아 작가에게 문을 연 이유가 무엇일까. 예술철학의 유니크함이다. 이 글을 쓴 이유다. 6년간의 전시 심의 과정도 이념과 지연과 학연, 패거리 문화에 함몰된 우리네 정서와 달랐다. 오직 작가의 철학을 우선했다. 다름, 그것은 예술과 미술관의 존재 이유이자 뉴욕이 예술의 메카가 된 결정적 이유다. “물하고 비는 무엇이 다릅니까”. 그해 가을의 전설로 간다.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 “물하고 비는 같은 H2O 아닙니까?” “우리는 같은 인간이다. 그런데 너와 나의 정체성이 같은가?”. ‘젖지 않음’은 정체성의 다름에 대한 은유다. 모든 인간의 정체성이 다르듯이 물과 비의 본질은 같지만 정체성은 다르다. 같은 비라도 이슬비와 가랑비가 다르고, 봄비와 가을비가 다르다. 어제 내린 겨울비와 오늘 내린 겨울비의 정체도 다르다. 자연과 우주에 명멸하는 모든 존재는 실재하지 않더라도 정체성은 살아있다. 호수에 내린 가을비는 곧바로 죽어 물이 되지만 비의 정체성은 살아있다. 살아있는 수많은 정체가 물의 근원 생명이다. 점이 죽어 선을 만들고, 선이 면을, 면이 공간을 형성하지만 공간에 점, 선, 면의 정체성이 살아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다름의 정체성을 창조하고 실존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의지’다. 의지는 물리적 행과 공명하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정체성이 표류하지 않도록 잡아주는 고삐와 같다. 청출어람 인공지능(AI) 시대, 창조의 영역이 카오스에 들었다. 카오스는 카오스 속으로 들어가야 해체된다. 인간의 성찰이 빛날 시간이다. 우주는 다름의 총합이다. 우주가 멸하더라도 비는 비고, 물은 물이다.

[문화카페] 리얼리즘과 아브젝트 아트

현대의 모든 예술작품들의 묘사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아름다운 이상’과 ‘추악한 현실’로 나눈다면 대다수의 예술작품이 ‘추악한 현실’이지 않을까. 한국 영화 예술의 정점인 작품 ‘기생충’이 ‘추악한 계급 사회의 현실’을 표현하며 오스카상이라는 쾌거를 이뤘듯 말이다. 필자는 예술사 전반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이 가장 크게 바뀌기 시작한 때를 리얼리즘(realism)이 등장한 19세기 중반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재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예술 사조인 리얼리즘이 실제로 예술의 폭을 방대하게 확장시켰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주관성이 아닌 객관성이 강조되는 리얼리즘이 어떻게 예술의 흐름을 바꿨다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필자의 답은 리얼리즘이 드디어 그 이전에는 하나의 소시민에 불과했던 인간 본연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이것이 예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후로 예술은 더 이상 우상적이고 미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평범한 인간사와 잔혹한 현실 등 리얼리즘, 문자 그대로 사실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냉혹한 현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한편 현대에 와서 예술의 대상은 예술가의 주관적인 관점부터 객관적 사실을 넘어 그 어떤 것이라도 가능해졌다. 예술을 향유하는 관람자, 관객, 소비자, 그리고 독자들은 이제 예술에서 아름다운 부분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깨우는 것, 찌르는 것, 그리고 새로운 것과 같은 강렬한 어떤 것에 주목한다. 심지어 이의 연장 선상에서 예술은 그 대상으로부터 더럽고 추악한 것이나 공포 같은 감정을 추구하기도 한다. 현대에 와서야 예술적 대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아브젝트(Abject) 아트’가 그렇다. 아브젝트 아트는 예술적 대상뿐만 아니라 대상 주변의 어둡고 버려진 것까지를 포함한다.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1980년 ‘공포의 권력: 아브젝시옹에 대한 에세이’를 통해 아브젝트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했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아브젝트는 인간의 배설물이나 정액, 쓰레기, 동물의 사체같이 더럽고 추악하거나 공포감을 주는 것이고 그 대상에 의해 느껴지는 혐오적 감정을 아브젝시옹(Abjection)이라고 하며 이 둘은 우리가 인생에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술에 대한 시각과 폭이 넓어진 현대에 와서야 주목받게 된 아브젝트 아트는 바로 이러한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의 예술적 표현인 셈이다. 때마침 현대미술사에서 아브젝트 아트로 독자적인 방향성을 꾸준히 확립해온 독일 출생의 미국예술가 키키 스미스가 선보이는 미술관 개인전 ‘자유낙하’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이 작가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상적인 인간의 육체나 그로부터 느껴지는 황홀함 따위는 느낄 수 없다. 특히 그러한 이상적인 육체의 흔한 대상이었던 여성이 철저히 파괴된다. 불편하고 적나라한 인간의 자세가, 파편화된 육체가, 그리고 배설물이 예술의 대상에 대한 기득권적인 인식에 질문을 던지며 전시돼 있다. 흔하지 않은 기회의 이번 아브젝트 아트 관련 전시회는 우리도 모르게 자리 잡은 예술적 대상에 대한 선입견을 파괴하고 그동안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그 너머에 대해 눈을 뜨게 할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필자가 아브젝트 아트의 중요성을 논하는 것은 마치 전체적인 예술사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처럼 현대예술의 흐름과 확장에 있어 아브젝트 아트 역시 하나의 돌파구가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매혹적인 이유로 흥미로운 구조의 외연뿐만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대단한 복잡함에 있으며 그러한 모습이 우리의 인생과도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매력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사소한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가 거대한 담론으로 완성되기도 하는 유연한 확장성에 있으며 관념은 돌고 돌아 결국 나 자신과 연계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예술의 본질이자 존재 이유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문화 카페] 산업 통계로 본 한국영화계의 현주소

영화진흥위원회에서는 연도별, 상·하반기, 월별로 국내 영화 산업에 관한 결산 자료를 공개한다. 이 가운데 연도별 결산 보고서는 통상적으로 매년 2월20일 전후에 발표되므로 2022년 영화 산업 현황을 나타내는 모든 사항을 아직 상세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러나 2022년 12월 결산 보고서 안에는 2022년 한 해 동안의 극장 상영작과 관객 수, 매출액뿐 아니라 국적별, 기업별 매출액과 관객 점유율 등에 관한 통계적 수치가 정리되어 있어 이를 통해 한국 영화계의 현주소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한 해 동안 극장 개봉 편수는 총 1천773편, 관객 수는 1억1천280만여명, 매출액은 1조1천602억여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한국 영화는 개봉 편수 771편, 관객 수 6천279만여명, 매출액 6천310억여원으로 이는 전체 대비 개봉작 점유율 43.5%, 관객 수 점유율 55.7%, 매출액 점유율 54.4%에 해당한다. 2021년 극장 개봉 편수는 1천637편이었으며 그중 한국 영화가 653편, 외국 영화가 984편이었다. 2022년과 별다른 차이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관객 수는 6천53만여명, 매출액은 5천845억여원이었고 한국 영화의 경우 1천822만여명과 1천734억여원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2022년 한국 영화계의 산업 환경이 전년도에 비해 크게 개선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데에는 2022년 들어 코로나19의 여파가 다소 진정됐다는 점이 배경으로 자리한다. 코로나19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2020년 극장 관객 수는 5천952만여명, 매출액은 5천104억여원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적어도 최근 십수년 사이의 최저 수치에 해당한다. 한국 영화의 비중 또한 주목된다. 2020년 관객 수 4천46만여명, 매출액 3천504억여원으로 각각 68.0%, 68.7%를 차지하던 것이 2021년에는 30.1%, 29.7%로 절반 이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코로나19의 대유행하에서 한국 영화의 기획, 투자 및 제작 활동이 위축된 결과로 풀이된다. 따라서 영화 산업적 흐름에 있어 2022년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상승 국면으로의 전환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고 할 만하다. 단적으로 2010년대 매년 50%대를 유지했던 한국 영화의 점유율이 2020, 2021년 크게 요동쳤으나 2022년에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한 회복 상황을 맞이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팬데믹 이전까지 국내 극장 관객 수는 7년 연속 연간 2억명 이상을 기록 중이었고 2019년에 이르러 2억2천668만여명이라는 최대 수치에 도달한 바 있었기에 그렇다.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인해 4분의 1 수준으로 급락했던 것이 2022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2배가량의 회복세를 나타낸 것이다. 국내 영화 산업의 회복세를 견인한 것으로 1천269만여명의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워 역대 10위에 오른 ‘범죄도시 2’를 비롯해 726만여명의 ‘한산: 용의 출현’과 698만여명의 ‘공조 2: 인터내셔날’, 아울러 외국 영화로는 818만여명의 ‘탑건: 매버릭’ 및 12월에만 731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한 ‘아바타: 물의 길’ 등 이른바 흥행 ‘대작’들을 지목할 수 있다. 그러나 스크린 독점 등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대부분이 연작이나 시리즈물 형태를 취했다는 점에서 이들 작품의 제작 경향이 긍정적인 신호만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 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월30일부터는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되면서 극장을 찾는 이들의 발길도 갈수록 잦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써 영화 산업이 더욱 활기를 띠게 될 2023년에는 보다 다양한 소재와 매력을 지닌 작품들이 적극적으로 기획, 제작돼 전국의 스크린을 채워 주기를 기대한다.

[문화카페] 사람이 곧 콘텐츠다

즐겨 쓰는 표어 중에 ‘사람이 콘텐츠다’라는 문장이 있다. 어느 강연에서 어떻게 사람이 콘텐츠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의 성과물인 콘텐츠의 제목이 떠오르는 사람, 그 사람은 곧 콘텐츠일 수 있다고 답을 했더니 수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종사하는 공연 분야에서 명성황후의 윤호진, 난타의 송승환을 예시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는 콘텐츠가 그의 머릿속에서 탄생했고 그 콘텐츠의 주인이라는 것, 그 콘텐츠가 20년 이상 장수하는 흥행작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콘텐츠에 평생 자신의 존재를 건다는 것이다. 영화나 여타 콘텐츠와 공연 콘텐츠의 차이점은 다른 콘텐츠는 일회성의 제작 후 그 결과물이 미디어 플랫폼에 의해 반복 재생돼 유통되는 데 반해 공연은 재공연할 때마다 새로 제작하듯이 참여한 모든 사람과 프로덕션이 실질적인 작업을 또다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연을 노동집약산업이라고 하고 공연 콘텐츠의 프로듀서는 평생 그 콘텐츠를 재탄생시키는 창조자의 역할에 초심을 다독여야 한다. 얼마 전 송승환 감독은 19년 만에 다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공연을 올린 난타의 현장 사진을 생중계하듯이 전송해 줬는데 19년 전에 초연했던 뉴빅토리시어터 극장에서 다시 두드리는 난타의 울림이 감격적으로 전해졌다. 특히 19년 전 극장 앞에서 사진으로 남겼던 기념을 19년 만에 재현했는데 잘생긴 청년 같은 송 감독은 연륜과 지혜로 원숙해진 은발의 장인으로 변해 있었다. 25년 장수한 난타라는 콘텐츠가 곧 송승환이라는 입증이었다. 그리고 그 25년 세월 동안 한 콘텐츠를 성장시키고 완성시키기 위해 그가 치러야 했던 그야말로 피, 땀, 눈물은 강을 넘어 바다를 이뤘을 듯싶다. 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초연했던 창작 뮤지컬 영웅의 공연 현장에서 전율을 느꼈던 적이 있었는데 공연 1년 전에 윤호진 감독이 구체적으로 묘사한 장면 장면이 똑같이 무대 위에서 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콘텐츠에 대한 집요하고 치열한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윤호진이란 이름이 곧 콘텐츠임을 부인할 수 없다.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으로 한국 뮤지컬 역사에 개척적인 기록을 스스로 계속 갱신하고 추가하며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아는 콘텐츠로 두 공연을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뮤지컬 영웅은 뮤지컬 영화로 제작돼 3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한국 뮤지컬 시장으로선 새로운 역사가 또 만들어지는 상황이다. 다른 장르도 그렇지만 콘텐츠의 실체는 그 콘텐츠를 탄생시킨 크리에이터와 프로듀서다. 무형의 가치인 콘텐츠의 존재감이 점점 더 강력해지는 사회 패러다임 속에서 사람의 창의적인 상상력과 그 꿈을 현실로 실현시키는 치열한 열정과 노력 자체가 유형의 자산가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곧 콘텐츠임에 틀림없는데 더 명확하게 표현하면 창의적이고 집요하게 포기할 줄 모르고 스스로의 창의성에 평생을 거는 사람이 곧 콘텐츠다.

[문화카페] 중력을 거스르는 법

통곡하듯 웃었다. 쇠구슬 3개가 위로 굴러 올라가고 있었다. 손녀가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꼭대기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쇠구슬 3개가 동시에 아래로 굴러 여러 장애물을 통과해 한곳에 모이게 되는 재미있는 구조물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게 중력이야! 그런데 중력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게 할 수 없을까?” “위로 올라가지는 못해.” “소울이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휴일 저녁 늦은 시간, 초등학교 3학년 손녀와 주고받은 대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조립에 몰두하던 손녀가 나를 불렀다. 아래쪽에 함께 있던 3개의 쇠구슬이 위로 굴러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줬다. 비산하는 물방울처럼 사뿐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분명 중력을 거스르고 있었다. 구슬이 아래로 굴러 내리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거꾸로 돌렸던 것이다. 손녀의 역발상에 숨 넘어 가듯 웃었다. 아이는 지난밤 꿈속에서 중력을 거스르는 법을 깨쳤다. 중력이 우주 만물의 이치라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은 인간의 일이다. 중력을 거스르기에 물리적 에너지와 정신적 에너지가 있다. 인간의 우주탐사는 물리적 에너지의 임계상황으로 중력과의 전장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우주군의 비밀 임무 위성을 싣고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쏘아 올린 팰컨헤비 로켓의 추력은 약 500만파운드로 승객과 화물, 연료를 가득 채운 747 점보기를 우주로 올려 보낼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이는 인류사에 현존하는 최고의 반중력이다. 상대적으로 정신적 에너지는 1㎎의 추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물리적 에너지를 활성화할 수 있는 심리적 환경 혹은 근원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근원적 상상력은 마음이 창의적으로 지각하는 행위이다. 그것이 개념(concept)이다. 개념은 예술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지며 현대미술의 전부라 해도 과하지 않다. 개념화된 정신적 에너지의 추력은 한계가 없다. 시공간을 초월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다. 역설적으로 500만파운드의 추력은 1㎎의 물리력도 갖지 못한 정신적 에너지 진화의 척도이며 과학과 예술의 상호 동질성의 교집합이다. 아래쪽에 있던 쇠구슬을 위로 올리기에 실재하는 물리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아이가 그것을 간단하게 해결했다. 그러나 개념이 공감받기 위해서는 창의적 지각행위가 합당한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합당한 차이는 3개의 쇠구슬이 위로 굴러 올라가는 현상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아이의 마음속에 환상적 혁명을 일깨워줌이다. 그 과정이 진화다. 인간이 우주로 가는 모든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현대문명의 이기를 다루는 데 도가 턴 요즘 아이들에게는 여반장이지만 중력을 거스르기 위해 고민했을 인간의 가치에 주목한다. 손바닥이 아릴 듯 박수를 쳤던 이유다. 그럼에도 모든 생명체의 탄생은 익은 감 떨어지듯 그냥 오지 않는다. 나오려는 나의 의지와 내려는 어미의 의지의 합이 맞아야 생명을 얻는다. 중력을 거스르는 어미와 자식의 고통의 합이 생명 탄생의 숭고함이다. 그 위대한 탄생은 중력과의 싸움의 시작이다. 뒤집고 앉고 직립해서 두 발로 걷는 일, 모든 과정이 중력과의 싸움이다. 중력에 순응하려는 타성과 중력을 거스르려는 진화의 속성이 맹렬하게 대치한다. 태어남(誕)과 살아감(生)이다. 그렇게 인간이 끊임없이 중력을 거슬러야 하는 이유는 내 존재 이유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주의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3개의 쇠구슬이 위로 굴러 오르는 장면은 통쾌했다. 손녀의 역발상을 축복한다.

[문화카페] “I shop, therefore I am”

1987년 미국 출신의 설치미술가 바버라 크루거는 ‘I shop, therefore I am(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을 제목으로 한 사진작품을 세상에 소개하며 현대사회에서의 소비개념을 예술적으로 확장한 바 있다. 그녀의 메시지는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명언 ‘I think, therefore, I a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을 차용한 것으로 소비에 대한 현대인의 욕망을 예술작품을 통해 거침없이 드러낸 것이다. 당시 파격적인 메시지로 주목받았던, 사진과 텍스트가 마치 광고물처럼 조합된 이 작품은 35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몇 가지 화두를 제기할 수 있을 만큼 흥미롭다. 먼저 이 작품을 통해 쇼핑이라는 행위를 인간의 존재감과 동일시할 만큼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소비에 대한 인식이 확대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광고적 수법의 메시지 아트는 일상과 예술의 자연스러운 융합을 함의한다.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예술가들이 예술을 타 산업과 융합하고 일상으로 가져와 대중화시키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취했음을 밝혀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대중의 일상 속에서 상업적인 가치를 목적으로 삼는 제품 브랜드들도 예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자신들의 상품과 예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드러내는 아트마케팅에 힘을 쏟기 시작했으며 이는 이후 수많은 아트 컬래버레이션이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대표적인 예로 2012년 대규모로 진행된 루이비통과 일본의 설치미술가 쿠사마 야요이의 컬래버레이션을 들 수 있다. 당시 컬래버레이션 전시를 기획한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는 ‘상업적’으로, 전 세계 루이비통 매장들의 쇼윈도에서는 ‘예술적’으로 전시가 진행됐고 결과적으로 루이비통의 명성과 야요이의 예술성도 모두 성공을 거두게 됐다. 이렇게 브랜드를 소비하는 소비자와 예술을 관람하는 관객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동시대의 적극적인 아트마케팅은 소비자를 자신도 모르게 브랜드의 주체자로서 깊이 빠져들게 한다. 이러한 브랜드의 소비자 주체성 현상은 예술의 관객 주체성과 궤를 같이한다. 역사와 함께 진화한 관객들이 이제 예술 공간에서 단순히 관극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하고 소통하며 생산자의 관점에서 예술을 경험하기를 희구한다. 또 경험에 더해 예술과 상품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를 바라는 욕구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수많은 럭셔리 패션 브랜드의 예술적 형태의 전시회가 오늘날과 같이 성행하게 되는 데 견인한 배경이다. 실제로 세계적인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은 더욱더 예술과 닮아가기를 원하고 예술적 차원의 상업활동에 힘쓴다. 관객들은 해당 브랜드의 전시 관객에서 예술작품을 구매해 소장하려는 소비자로 변모한다. 즉, ‘I shop, therefore I am’ 브랜드 제품이 어느새 예술작품으로 둔갑해 내 손으로 오게 되는 경험을 만끽하는 것이고 쇼윈도가 아닌 전시회나 박물관에 전시된 예술작품 같은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문화카페] 한 거장 감독의 ‘겨울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이유

지난주 목요일인 2022년 12월 29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고(故) 신상옥 감독의 유작 ‘겨울 이야기’의 언론배급 시사회가 열렸다.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치매를 얻은 노인(신구 분)과 그를 보살피는 며느리(김지숙 분) 사이의 가족애를 다룬 이 영화가 18년간 미공개 상태로 있다가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100년이 넘는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 신상옥 감독은 가장 특별한 이력을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남한에서 최고의 감독 및 제작자로 활동하다가 납북된 뒤 1980년대에는 북한 영화를 만들기도 한 데다 1950, 60년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최은희와의 염문과 결혼, 이혼과 재회, 그리고 동반 탈북이라는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을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영화’ 같은 생애를 보낸 신상옥 감독이 인생 말년에 남긴 마지막 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겨울 이야기’는 대중의 관심과 언론의 조명을 받기에 충분하다. 사연 많은 거장 감독의 손을 거친 어느 한 작품이 후대에 완성돼 일반에 공개되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기에 그렇다. 더욱이 지금은 ‘거장(巨匠)’으로 불릴 만한 영화감독이 나오기 쉬운 시대가 아니다. 디지털 영상 매체의 기술적 발달로 인해 누구라도 영상물 제작이 가능해졌고 다양한 콘텐츠가 온라인 공간을 채우고 있으며, 이에 따라 영화의 소재와 기법 또한 보다 자극적이면서 감각적인 경향을 띠게 됐다. 게다가 코로나19의 영향하에 OTT 드라마가 약진하고 영화의 배급 방식, 상영 체계, 관람문화 등을 둘러싼 전반적인 변화가 일면서, 그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제기됨은 물론 영화의 종언이 점쳐지기까지 한다. 이러한 면에서 ‘겨울 이야기’가 설을 앞둔 18일에 개봉된다는 소식은 반가움을 넘어 기대감을 자아내게 한다. 과거 영화계에서도 ‘명절 특수’나 ‘구정 대목’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만큼 추석과 더불어 설 연휴에는 시내 영화관이 흔히 인파로 북적였는데, 진지한 문제의식과 과감한 실험정신을 통해 서사, 주제, 형식적 차원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을 선보여온 신상옥 감독의 영화 역시 스크린을 장식하곤 했다. 그렇다면 이미 17년 전 세상을 떠난 거장의 유작 속에는 84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과연 어떠한 이야기가 어떻게 연출돼 있을까. 이번 겨울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강추위를 녹여줄 가슴 따뜻해지는 영화 한 편이 벌써 기다려진다. 올 설 연휴에는 오랜만에 극장가를 찾아 한 편의 영화가 선사하는 진한 감동을 느껴봐야겠다.

[문화카페] 한 잔의 차를 올립니다

거미줄에 걸린 안개가 보석처럼 빛났다. 거미는 안마당을 비워 놓은 채 벗을 기다리듯 느긋하다. 안개 잦은 겨울 아침, 거미줄과 안개와 햇빛이 빚은 환상적인 풍경이다. 새집이 있다. 벌집이 있다. 아프리카흰개미 집이 있다. 인간의 감각을 초월할 정도로 구조적이고 정밀하다. 새집과 벌집이 그러하듯 흰개미집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건축시스템보다 더 효율적이라 했다. 인간은 자연을 모델로 진화를 거듭했다. 인간이 보기에 그대로인 것 같지만 지구 생태계 생성 이전부터 새집과 벌집, 개미집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원시시대 움막에서 마천루로 진화한 인간 진화의 속도와 다를 뿐, 그들도 진화한다. 코끼리, 코뿔소, 사자, 호랑이는 집을 짓지 않는다. 영역을 지배한다. 미물은 낮추며 산다. 바이러스는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한다. 모든 존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주의 아름다운 별, 지구란 행성에 왔다. 인간은 새처럼 집을 짓고 호랑이처럼 영역을 지배한다. 옛날 옛적부터 동굴에 흔적을 남길 줄 알았고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지었다. 21세기 파라오를 꿈꾸는 빈살만은 새로운 미래를 의미하는 네옴시티를 시작했다. 온 우주에 비해 바이러스 크기에 불과한 인간은 교(敎)와 행(行)이 새의 양 날개처럼 등가를 이루며 문명을 창조했다. 광의적으로 우주에 기거하는 모든 것은 창조다. 예술이다. 그 사이에 인간의 예술이 경기를 일으킬 경천동지할 사건이 발생했다. 인공지능(AI)이다. AI는 순식간에 엄청난 그림을 쏟아낸다. AI가 그린 그림을 보는 순간 말을 잃었다. 낯설고 익숙한 모든 유형의 꼴이 망라됐다. AI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생물학적 자식이 아니라서 호모사피엔스의 종말이라 우려하지만 메타 호모사피엔스의 기원으로 긍정할 일이다. 당연히 AI 가 그린 그림도 예술이다. 예술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서 그렇고, 진화의 속성은 실수로 던진 패라도 윷판처럼 백도가 되지 않기에 그렇다. 이달 1일 공개된 AI가 만든 챗봇 ‘Chat GPT’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경외심마저 든다”고 했다. 이미 인류사의 상수가 된 AI는 인간의 수를 한참 넘어섰다. “AI 시대는 빅데이터가 생명이다.” 이어령 선생의 통찰은 현상이 됐다. 그럼에도 인간이기를 축복하는 예술과 종교와 철학의 경계를 초월한 인류 문명사의 위대한 창조, 파르테논이 있다. 피에타가 있다. 모나리자가 있다. 미켈란젤로가 시작부터 피에타를 조각하거나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린 것은 아니다. 생명을 다해 돌을 다듬고 그림 하던 어느 순간, 돌 속에 있는 지저스와 마리아를 보았다. 내 속에 있던 어미(母)의 자비가 차가운 돌 속에 있던 지저스의 생명이 됐다. 삶은 죽음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 죽음은 삶에 의해 정체를 가진다.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양망(兩亡)의 세계, 피에타가 됐다. 모나리자가 됐다. 부활의 참이다. 윤회의 참이다. 정으로 돌을 조각한다. 칼로 나무를 조각한다. 지저스가 되고, 붓다가 된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정으로, 칼로 조각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인간이다. 인간이 기도하고 수행하는 이유다. 내 속에 있는 지저스와 붓다를 조각하기 위해서다. 모든 인간에게 내재한 경이로운 세계, 이것이 지저스와 붓다의 존재 이유다. “최고의 작품은 내 안에 있다.” 죽음을 앞둔 미켈란젤로의 말도 같은 의미다. 모든 것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2022년이 저문다. 영원으로 간다. 인간을 성찰한다. 예술을 성찰한다. 한잔의 차를 올린다.

[문화카페] ‘소전서림’ 흰 벽돌에 둘러싸인 책의 숲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봤을 상상 속의 서재가 있을 것이다. 드넓은 책장에는 순서에 맞춰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들이 둘러싸고 그 시선의 끝은 적당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조도의 조명이 있으며 알맞은 사이즈의 책상과 부드러운 의자가 있는 서재.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이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몇 가지 특별함이 더해진 장소가 있다. 화이트톤의 감각적인 공간 구성과 더불어 흰 벽돌 문양이 4m가 훌쩍 넘는 천장을 감싸고 있고, 고급 인테리어 잡지에서나 만날 법한 가구가 즐비하다. 이와 더불어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프랜시스 베이컨, 윌리엄 켄트리지 작품과 같은 유명 회화 작품이 곳곳에 걸린 예술과 인문학 관련 책들만으로 정돈된 서재와 도서관의 융합, 바로 2020년에 개관한 청담동에 위치한 소전서림이다. ‘7.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타자의 생과 다른 세계에 이르는 길이라 그 공간은 익숙함에서 벗어난 공간이어야 한다.’ 소전서림의 공간개념에 대한 철학의 7가지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일상과 환상을 수차례 넘나들 것 같은 예술의 형태로 우리 일상의 한 공간으로 자리 잡은 이 공간은 어느 땐 프라이빗 서재같이 느껴지다가 어느 틈에는 예술도서관으로, 그리고 만남과 교류의 예술살롱으로 변모한다. ‘흰 벽돌에 둘러싸인 책의 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간의 뼈대를 이루는 내부와 더불어 건물의 외부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공수해온 흰색 특수 벽돌로 마감했고 스위스 건축가 다비데 마쿨로에 의해 정사각 큐브가 쌓아 올려진 형태로 지어졌다. 특히 소전서림은 약 4만권의 책 중에서 문학예술 관련 책만 3만권에 이를 만큼 예술도서관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그러한 이유로 필자에게 이곳은 도서관의 기능으로서 단순히 지식을 확장하는 곳보다는 미지의 보물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된다. 한편 소전서림은 몇 가지 역설적인 부분에서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먼저 실제로는 개인적인 공간인 서재와 도서관은 공존할 수 없다는 점이 그렇다. 또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청담동에서 도심 속의 고요한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설계부터 일상과 유리된 공간을 지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소통의 장을 구현하려 한다는 점도 그렇다. 편안함을 추구하지만 실제 소전서림의 분위기는 공간을 이용하는 이들로 하여금 굉장히 조심스럽고 차분하게 만든다. 이곳의 입구인 나선형 계단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예술의 곁에 다가가 예술을 실행하는 주체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익숙함을 벗어난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보물찾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소전서림의 책의 숲과 같은 도서관의 대공간뿐만 아니라 ‘예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라는 뜻의 ‘예담’에서는 테마 전시, 강연, 공연과 낭독회 등의 이벤트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또 예술에 대한 논의와 원데이클래스가 열리는 ‘하오재’가 있으며 중정의 작은 야외공간 놀이터에서는 잠시 맑은 공기와 함께 쉴 수도 있다. 이 처럼 소전서림의 모든 공간이 의미 있고 특별해 보인다. 예술적 공간이 주는 영감으로 누군가는 오늘도 그곳에서 작품을 탄생시키고 있을지도. 박성연 호원대 공연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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