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식구에 토피라는 이름의 강아지가 있다. 평소 내가 놀아주고, 맛있는 간식도 내가 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생각이 그렇게 일어난다. 그런 풍토에서 교육받고 자라며 사회화됐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는 물질적 바탕도 중요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성경 말씀이나 유럽의 경우에도 근대와 현대 초반까지 가난한 사람들과 부랑인에 대한 거부감이 아주 짙었던 것은 자체로 먹을 게 부족한 사정 때문이지 여유가 있는데도 그러진 않았으리라 생각해본다. 물론 복지 대상(노인, 고아, 과부, 빈자, 장애인…)의 확대처럼 꾸준한 노력 없이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이 바뀌기는 어렵다. 그래서 제도를 먼저 바꿔 그런 태도를 고치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노예제도 금지, 헤이트스피치 금지법, 차별금지법 등이 좋은 예다. 마음을 다잡고 반성하며 펫(pet) 권리로서의 동물복지를 생각해 놀아주고 먹을 것 챙겨주는 게 식구의 의무이자 토피의 권리라고 생각하려 한다. 그런데도 순간 순간 ‘내가’ 새어 나온다. 이런 우리 세대에 살아있는 물고기를 죽이지 않고 뜨거운 물이나 얼음에 넣으면 벌금을 내야 하는 유럽의 동물복지가 받아들여질까? 특히 산 낙지와 살아있는 게, 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아는 게 힘이지만 또 병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난 뒤 낙지며 전복이 살아서 꼬물거리는 볶음이나 탕을 보면 입맛이 달아나고 만다. 환경 보호나 생태 보호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먹고살기 쉽지 않은데 환경이니 생태에 생각이 미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이젠 환경과 생태 보호는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왜 그럴까? 세 가지만 언급해 본다. 첫째, 생태와 환경 보호가 필요하게 된 게 바로 인간 때문이다. 인간이 망가뜨리지 않았다면 멀쩡했을 터이다. 둘째, 생태와 환경 보호가 생태와 환경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위해서다. 셋째, 결정적으로 법과 제도를 통해 생태와 환경의 훼손을 금지하고 보호를 의무화한 덕이다. 어기면 스스로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싫더라도 지켜야 한다. 결국 인간 중심주의가 바탕이다. 그런데 인간이 식물이나 다른 동물보다 더 귀해야 할 과학적 이유는 없다. 지구 차원에서 보면 인간은 지구를 위협하는 존재이지 식물처럼 모든 생명체의 존재 근거는 아니다. 따라서 이제라도 동물복지를 법과 제도로 못 박아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부정적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성경 말씀에 따라 긍정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하나님 모습대로 만들어진 사람이고 모든 피조물의 관리를 맡기셨다. 그런데 그 관리에 소홀했던 걸 반성하면서 적극적인 관리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벤담의 공리주의에 따른 철학적 근간인 동물복지도 마찬가지다. 비록 우리 모두의 관리 대상이지만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생명으로 존중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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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2023-04-03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