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핸드메이드 라이프

지난해 10월 루마니아 북부 마라무레슈 지역을 여행했다. 산들에 둘러싸인 목가적인 풍경과 세계문화유산인 목조교회로 이름난 지역이었다. 풍경도 건축물도 아름다웠지만 그보다 내 마음을 흔든 건 사람들이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그들은 경계심 없는 수줍은 태도로 이방인을 맞았다. 들판에서 건초를 베는 여인도, 자른 나무를 마차에 싣고 가는 남자도, 동네 어귀에 모여 수다를 떨던 할머니들도 손을 흔들면 마주 흔들어 주고, 눈이 맞으면 미소를 지었다. 열린 대문 사이로 마당을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꼭 안으로 불러들여 포도나 사과 같은 것을 가득 담아 줬다. 그곳에서는 한 번도 과일을 사지 않았다. 배낭에는 채 다 먹지 못한 과일과 마늘, 고추, 파프리카 소스 같은 것들이 늘 들어 있었다. 그날도 동네를 구경하며 어슬렁거리던 길에 마당에서 포도를 수확하던 가족과 눈이 마주쳤다. 아들 크리스티안과 그의 엄마 로디카였다. 집으로 들어오라기에 기꺼이 들어갔다(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마당의 포도를 따 포도주를 담그는 날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의 중요한 연례행사가 철마다 과실주를 담그는 일이었다. 작년에 담갔다는 포도주도 한 잔 얻어 마시고, 역시나 포도와 사과를 한 아름 얻어 귀가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그 집에 들러 한국 화장품 세트를 선물로 드렸다. 환하던 로디카의 얼굴이 더 환해졌다. 내가 그녀의 웃는 얼굴을 찍으며 소셜미디어에 올릴 거라고 했더니 로디카가 비명을 질렀다. “립스틱도 안 발랐는데! 내 옷차림 좀 봐!” 하며 깔깔 웃었다. 선한 인상에 웃음이 많은 그녀 같은 사람이 마라무레슈에는 가득했다. 작은 마을 브랩에서 머문 숙소는 120년 된 목조가옥이었다. 12년 전 아무도 이 마을을 찾지 않던 시절에 영국인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했다. 그들은 낡은 목조주택을 하나씩 사들여 아름답게 고쳤고, 이 지역의 여성들이 만든 수공예품들로 꾸몄다.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집을 에어비앤비에 올려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 마을에는 식당도 없었다. 이들은 마을의 음식 솜씨 좋은 여성 세 명을 섭외해 돌아가며 그 집으로 손님들을 보냈다. 지금 이 마을에는 숙소가 20개 가까이, 식당도 서너 곳이 생겼다. 루마니아인은 물론이고 외국인까지 이 마을을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브랩의 숙소를 돌보는 이는 20대 여성 안드라다였다. 주근깨 핀 얼굴에 반짝이는 눈이 만화영화 주인공 같았다. 우리가 도착한 날 체크인을 마친 그녀는 “긴급한 용무가 있다”며 서둘러 떠났다. 그 긴급한 용무는 그녀의 염소 세 마리를 몰고 집으로 가는 일이었다! 그녀는 매일 세 마리의 염소와 함께 출근해 염소와 함께 퇴근했다. 루마니아인의 다수가 정교를 믿는데 안드라다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왜 교회에 안 나오냐고 물으면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그야 전 교회에 입고 갈 옷도 없는 걸요.” 그 핑계가 정말로 그럴듯하다는 걸 교회에 가보고서야 깨달았다. 한 주 내내 허름한 옷을 걸치고 부지런히 일하던 여인들이 일요일에는 대변신을 이뤄냈다.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단장하고 교회로 향했다. 그 화려한 옷차림 사이에서 청바지에 패딩 점퍼 차림으로 서 있던 나는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화사한 전통 옷은 대부분 직접 만든 것이었다. 자수를 놓은 조끼와 꽃무늬 치마, 양털 양말에 양가죽으로 만든 신발. 하나같이 정성과 시간을 쏟아야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마을 여성들은 긴 겨울밤을 자수를 놓으며 보낸다고 했다. 물론 이제는 스마트폰과 겨울밤을 나눠 써야 하겠지만. 마을을 걷다 보면 마당의 빨랫줄에 포도송이가 새겨진 베갯잇이며 제비꽃이 수놓인 방석 커버 같은 것들이 널려 있었다. 머무는 숙소의 커튼이며 침대보, 러그도 기성품이 없었다. 그 아름다운 수공예품을 볼 때마다 사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만들고 싶다’가 아니라 ‘사고 싶다’였다. 나는 이토록 자본주의의 충실한 신도였다.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을 스스로 만들어 쓰고, 직접 키워서 먹으며 살아가는 이곳에서도 한결 같았으니. 인간은 원래 놀이하는 인간이자 도구의 인간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도구를 써서 뭔가를 만들며 노는 능력 덕분이라고 본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우리의 육체성은 퇴화했다. 오래전 누구나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이제는 소수의 고급 취미가 됐다. 무엇보다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들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직접 만들기에는 우리는 너무 바쁘다(시간을 절약하게 해주는 모든 전자제품을 지니고 사는데 늘 시간이 없다). 이제 우리는 ‘구매하는 인간’이 됐다. 구매하기 위해 일하는 삶이다. 그런 면에서 루마니아 북부의 산간마을은 놀이하며 만드는 삶이 아직 살아 있었다. 노동과 놀이가 아직은 철저히 분리되지 않았고, 직접 만들어 쓰다가 물려주는 전통은 여전했다. 민박집의 주인 안젤리카도 자수를 놓아 손님방을 꾸몄고 시어머니와 시할머니의 혼수품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80세 노인이 자신의 할머니가 만든 자수품들을 나무함에 넣어 보관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당연히 내 안에도 뭔가를 만들며 사는 삶에 대한 로망이 있다. 소비하는 인간에서 생산하는 인간으로 변신하고픈 욕망이다. 그 욕망은 해마다 12월이 되면 절정을 이룬다. 12월이 오면 다람쥐가 잣나무 오르내리듯 꽃시장을 찾는다. 삼나무며 유칼리, 향나무, 측백과 편백 가지를 사와 가득 쌓아 놓고 리스를 만든다. 올해는 마흔 개의 리스를 만들어 절반은 선물하고 절반은 소셜미디어에 올려 팔았다. 재료비를 제하고 남은 돈의 절반을 유엔난민기구의 우크라니아 지원, ‘국경 없는 학교짓기’의 캄보디아 학교 지원금으로 보냈다. 둥근 나무 틀에 초록잎들을 감아가며 리스를 만들다 보면 사는 일의 크고 작은 근심 따위는 희미해졌다. 리스틀 안에 소재를 꽂을 때마다 나 자신도 온전히 투영되는, 쾌락에 가까운 몰입의 시간이었다. 내가 만든 리스는 비록 서툴지언정 내 자아의 일부가 포함돼 있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구매해서는 얻을 수 없는 원천적인 즐거움이 담겨 있다. 루마니아 산골에서 수를 놓는 여성들도 나와 같을 것이다. 무엇보다 적어도 그 순간에 우리는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것만 상상할 수 있다. 완성해서 쓸 때의 즐거움이라든가 선물 받을 사람이 보여줄 표정이라든가…. 시간을 쓰고 마음을 쏟아 손으로 만들어내는 행위는 결국 자아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표현된 자아는 쉽게 훼손당하거나 빠르게 사라지지 않는다. 루마니아가 나를 흔든 건 이렇게 손수 만든 물건으로 자아를 표현하는 능력이 퇴화되지 않고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내년 12월에도 나는 리스를 만들며 짧게나마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살아볼 것이다. 소비가 아닌 생산의 방식으로 잠시나마 나를 표현하기 위해.

[김남희의 길 위에서]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가기

밥상머리 교육을 받던 시절부터 일본 혹은 일본인에 대한 주의사항을 끝없이 들어왔다. 그런데도 지금 가까운 외국인 친구를 꼽는다면 전부 일본인이다. 내게 이렇게나 많은 일본 친구들이 생긴 건 전부 한 사람 덕분이다. 2008년 가을, 나는 “피스 앤 그린 보트(한국의 환경재단과 일본의 피스보트가 아시아의 환경과 평화를 위해 띄운 배)”에서 쓰지 신이치 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그는 일본의 환경운동가이자 문화인류학자로 <슬로 라이프> <행복의 경제학> 같은 책으로 우리 나라에도 잘 알려진 분이었다. 우리는 행복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함께 하며 가까워졌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신이치 선생님은 내 삶의 가장 큰 스승이자 벗이 되었다. 부탄과 일본, 한국을 여행하며 대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을 함께 쓰기도 했다. 그는 내가 일본에 갈 때마다 놀라운 수준의 “맡기기” 기술을 시전했다. “오키나와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니 오키나와의 평화운동가 치넨 우시 씨에게, “교토를 제대로 둘러보고 싶어요.”라고 하니 교토가 고향인 테리와 마유미 부부에게, “홋카이도에 갈 예정이에요.”라고 했을 때는 말 치료사인 요리타 씨에게 나를 맡겼다. 시모노세키에는 친구 우에노 씨가, 비와코에는 그의 형 코이치 씨가, 마츠모토에는 그의 동생 슌스케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전화 한 통화로 전국의 친구들에게 나를 맡겼다. 처음 만난 이들이 단지 그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환영했다.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거나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가이드를 자처했다. 나는 그런 호의에 기대어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국을 돌아다녔고, 그의 친구들은 내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이들이었다. 저항할 줄 아는 한국의 문화를 부러워하고, 그로 인해 일본보다는 한국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해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들의 극진한 배려를 느낄 때마다 나도 좀 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반드시 기억했다가 다음 만남에 선물로 주거나, 내가 좋아하는 곳에 데려가곤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더 나은 사회와 지속가능한 지루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희망의 싹을 키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만나면 만날수록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2년 반이 넘도록 문을 닫았던 일본이 지난 10월에 문을 열었다. 나는 동유럽에서 돌아오자마자 일본으로 향했다. 11월의 교토는 따뜻했고,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친구들의 호의에 철저히 기댄 여행이었다. 마유미는 여행의 프로그램을 함께 짜주고, 식당 예약을 비롯해 온갖 번잡스러운 일을 맡아줬다. 무엇보다 10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을 집으로 초대해 일본의 다도를 경험하는 시간을 선물했다. 신이치 선생님은 사흘간 우리와 함께 다니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라의 시골 마을에 사는 친구 카오리도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점심을 준비해줬다. 교토의 근대 도예가 가와이 간지로의 기념관에 들렀던 날, 우리는 그 동네의 조용한 카페에 모여 앉았다. 선생님은 라쿠고가(일본의 전통 1인 만담)로 데뷔한 재능을 살려 어린왕자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주셨다. 어린왕자의 친구가 된 여우는 어린왕자와 헤어지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너의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장미를 위해 낭비한 시간이란다.” 생텍쥐페리의 프랑스어 원서를 영어로 처음 번역한 이는 생텍쥐페리와 가까운 친구였다. 그 영문판에서는 “네가 낭비한 시간”이라고 번역되어 있었다(선생님은 이 번역본이 가장 프랑스어 원본에 가까울 거라고 했다). 어린왕자의 일본어 번역본 12개를 확인하니 그 중 10개가 그 표현을 바꿨다. “네가 낭비한 시간”이 아니라 “네가 쏟은 시간”으로. 낭비라는 단어는 너무나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번역자들이 단어를 바꿨을 거라는 게 선생님의 추측이었다. 낭비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시간이나 재물 따위를 헛되이 헤프게 씀”이라고 되어 있다. 좋은 의미라고는 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헤프지 않게, 헛되지 않도록 시간과 재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그로 인해 매사에 경제성과 효율성, 생산성을 따진다. 여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조지아를 ‘가성비 스위스’라고 표현하는 글을 읽고 혼자 서글퍼한 적이 있다. 조지아는 조지아만의 아름다움을 지닌 나라인데 왜 굳이 스위스와 비교를 해야 하는 걸까 싶어서였다. 여행지의 식당을 고르거나 명소를 찾는 일에서도 순위를 따지고, 리뷰의 평점을 체크한다. 경쟁이 심한 사회일수록 실패라는 경험의 무게는 무거워진다. 그러니 어떤 일에서도 실패하지 않으려 애를 쓴다. 매사에 가성비만을 중심에 놓고 살아갈수록 삶은 팍팍해지지 않을까. 일상이 우리에게 실패를 허용하지 않으니 여행에서라도 우리는 실패할 기회가 필요하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서도 성장하는 존재니까. 무용한 것들에 헌신해보는 경험도, 쓸모라고는 없을 일에 시간을 낭비해보는 일도 여행이라면 좀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비생산적이고,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며 살고 싶다. 시를 읽고, 그림을 보러 가고(예술이야말로 가장 헛된 낭비니까), 꽃을 사서 꽃아 보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음식도 만들어보고, 친구와 마주 앉아 온갖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교토와 나라의 친구들은 나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낭비했다. 마유미도, 신이치 선생님도, 카오리도 ‘돈이 되지 않는 헛된 일’에 헌신했다. 12월이 되어 다시 일본을 찾아갔을 때도 한결같았다. 도쿄의 친구 히로미 언니도,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신이치 선생님도 나를 위해 돈과 시간과 마음을 쏟아부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싶다. 무용한 것들, 쓸모없는 것들에 기꺼이 에너지를 쓰며 살고 싶다. 과거를 돌아보거나 미래를 계획하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 온전히 몰입하면서 그렇게 살다가 가고 싶다.

[김남희의 길 위에서] 눈부시게 번듯한 오스트리아 수도 ‘빈’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했던 광대한 제국.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하이든, 슈트라우스, 말러가 활약한 음악의 수도. 영화 ‘비포 선라이즈’. 아인슈페너. 이 정도면 짐작할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을. 올해 어쩌다 보니 빈을 두 번 왕복했다. 여름에는 인스브루크와 잘츠부르크를 거쳐 빈까지 다녀왔고, 이번 가을에는 동유럽 여행의 시작과 끝이 빈이었다. 사실 나는 빈이라는 도시에 큰 애정이 없었다. 빈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 이 도시는 내 취향에는 너무 화려하고, 깔끔하고, 질서정연하다. 거대한 제국을 통치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640년 수도로서 긴 황금기를 누렸던 도시. 몰락했으나 몰락의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곳이 빈이다. 역시 대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은 도시의 거의 모든 곳에서 몰락의 흔적을 마주하게 되는데 빈은 여전히 눈부시게 번듯하다. 아무래도 나는 무너지고 바스러지는 것들, 폐허로 남은 과거의 영광, 사라진 광휘, 이런 것들에 흔들리는 사람이어서 빈은 늘 심심했다. 과장되게 말한다면 로마의 혼돈 속으로 뛰어들고 말지 빈의 질서 속으로는 투항하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 반듯하기만 해서 살짝 지루한 모범생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물가도 비싸 지갑이 얄팍한 여행자를 옹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물은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치러졌다는 슈테판 대성당도, 제국의 심장이었던 호프부르크 왕궁도 아닌, 영구 임대주택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였다. 환경운동가이기도 했던 건축가의 철학이 드러난 공동주택은 부드러운 곡선과 다채로운 색상으로 시선을 끌었다. 이렇게나 재미있고 참신한 영구임대주택이라니! 가우디가 설계한 카사바트요의 서민 버전 같았다. 당연하지만 빈에도 올 때마다 나를 설레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클림트와 실레의 그림이다. 클림트의 그림은 이 도시와 잘 어울린다. 금가루를 아낌없이 뿌린 화사하고 관능적인 그림들. 그의 삶조차도 그랬다. 큰 고생은 해본 적 없이 거의 삶 내내 전성기를 누렸던 화가. 생긴 건 수더분한 동네 아저씨 스타일인데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렸고,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은 채 자유연애를 즐겼다. 거기에 더해 영원한 연인 에밀리 플뤼게까지 있었던 복 많은 남자다. 사망한 후 14건의 양육비 청구 소송을 당하기도 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키스’나 ‘유디트’ 같은 그의 대표작도 좋지만 나는 초록에 둘러싸인 작은 집들을 그린 그림을 더 좋아한다. 몽환적이며 에로틱한 클림트의 그림은 자연히 눈이 가지만 내 영혼이 이끌리는 곳은 실레다. 강렬한 선들, 어두운 색채, 기괴한 포즈들, 대범한 노출. 어딘가 뒤틀린 내면을 응시하는 것 같은 그림들이다. 서로를 존경하며 좋아했던 두 화가는 20세기 초 빈 미술의 황금기를 공유했다. 그 시절 빈에는 수많은 예술가와 철학자가 활약했다. 그림에서는 클림트와 실레, 코코슈카 같은 이들이, 건축에서는 오토 바그너와 요제프 호프만, 아돌프 로스,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 문학의 카를 크라우스나 슈테판 츠바이크, 철학의 비트겐슈타인, 의학의 프로이트, 음악의 구스타프 말러 등. 그들은 카페 센트럴이나 데멜에 모여 저항을 도모하고, 관습을 거부하고, 인간의 심연을 응시했다. 때마침 빈의 레오폴트 박물관에서는 이들이 활약하던 1900년을 주제로 한 전시가 한창이었다. 빈에서의 마지막 날은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다녔다. 걷다 보니 흰색 건물 위에 황금색 월계수 잎이 촘촘히 박힌 둥근 돔이 눈에 들어왔다. 빈 분리파의 성전 제체시온이었다. 낡은 인습에 빠져 있던 빈 미술가협회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며 결성된 빈 분리파. 귀족과 왕실, 부르주아만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예술을 추구해 노동자계급에게는 입장료도 받지 않았다는 곳. 그 시절의 빈은 지금보다 훨씬 활기찼을 것이다. 옛것과 새것, 전통과 혁신이 충돌하며 새 시대를 향해 열정을 쏟아붓는 예술가들이 있었으니. 제체시온의 지하에서 눈물을 쏟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베토벤 프리즈’를 보러 온 건 두 번째였기에. 베토벤 프리즈는 클림트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의 마지막 악장 ‘환희의 송가’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행복을 향한 염원이 적대적인 힘을 넘어 시를 통해 이뤄지는 과정을 묘사한 길이 34m의 프레스코화 대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한 편에 헤드폰 세트가 걸려 있었다. 헤드폰을 쓰고 맨 오른쪽 벽, 행복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그림 ‘온 세상을 향한 입맞춤’ 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음악을 들었다. 노래도, 그림도 지나치게 생생했다. 귓전을 터뜨릴 듯 격렬하게 송가가 울려 퍼지고, 눈앞에는 클림트의 황금색이 빛나고 있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광채가 가득한 그림이었다. 노래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갈수록 내 감정도 격렬히 고조돼 갔다. “환희여! 신의 아름다운 불꽃이여! 온 세상에 입맞춤을!” 합창단원의 노래가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 울음이 터졌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더는 누리지 못하는 엄마 생각이 나서였다. 삶을 향해 온몸으로 입 맞추며 살았던 엄마. 두 달 전 세상을 떠난 엄마에게 이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엄마는 클림트의 그림을 좋아했을 게 틀림없다. 함께 여기 나란히 앉아 쏟아지는 삶의 환희를 누리고 싶었다. 고단한 날들에도 살아있음의 축복을 매 순간 누리며 살았던 엄마는 사라지고, 남은 생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나만 살아있는 현실이 거짓말 같았다.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 이의 의지는 또 얼마나 경이로운지. 눈물을 멈추지도 못하고 한바탕 울고 나오니 막혀 있던 가슴 한 편이 조금은 뚫린 것도 같았다. 사람이 위로해 주지 못하는 상처를 때로는 그림이나 음악이 어루만져 주기도 한다. 나는 그 찰나의 시간을 통해서야 뒤늦게 빈의 저력을 인정하게 됐다. 그날 오후에는 오스트리아 남자와 결혼해 빈에서 사는 지인을 만났다. 그녀는 이 도시가 살수록 좋은 곳이라며 극찬했다. 잘 갖춰진 사회보장제도에 더해 이 도시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가 있다고, 여기서 살기를 잘했다고. 나는 아무래도 빈을 사랑하게 된 걸까? 때마침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 티켓을 끊으려는 걸 보니. 늦가을 아인슈페너 한잔과 함께 빈의 정취에 빠져 봐야겠다. 김남희 여행작가

[김남희의 길 위에서] 유럽의 ‘이동권’ 이야기

올해 봄, 다시 카미노데산티아고를 걸었다. 이번에는 포르투갈의 포르투에서 시작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향하는 14일의 여정이었다. 어느날 숲길에서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걷는 여성 순례자와 마주쳤다. 오르막은 아니었지만 길이 고르지 않았다. 유모차를 밀며 걷기에는 힘이 꽤 드는 길이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쉬던 우리 일행이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초콜릿을 건네니 그녀가 환히 웃으며 받았다. 포르투갈 길은 급한 경사가 없어 쉬운 길로 꼽히지만, 숲이 많았다. 배낭만 메고 걸어도 힘든 길을 아기와 함께 오다니! 그 용감한 결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내면의 용기에 더해 그녀에게는 어떤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이 길에서 혼자가 아닐 거라는, 도움을 주는 선의의 손길이 있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그 믿음대로 그녀에게는 도움의 손길이 줄곧 이어졌다. 우리도 그녀의 유모차를 밀어주거나, 들어서 옮겨 주기도 했다. 도움을 받는 이도, 도움을 주는 이도 자연스러웠다. 우리가 산티아고에 들어선 다음날, 그녀와 아기도 타인의 친절에 기대 무사히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카미노의 정신이 오롯이 구현된 순례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하니까. 우리가 걷기에 급급해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그녀를 모른 척했다면? 제대로 카미노를 걸었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것이다. 그녀 또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혼자 힘으로 걸어야 했다면 좀 서글프지 않았을까. 그녀의 이야기를 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읽은 이가 질문을 남겼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자신도 그 길을 걸을 수 있겠느냐고. 전동휠체어로 카미노를 걷는 일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스페인에는 장애인들이 카미노를 걸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단체들이 있다고 했다. 전 구간은 아니더라도 카미노의 일부라도 경험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모아 주는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카미노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공공기관도 ‘모두의 카미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점이라고 했다. 모두를 위한 카미노라니. 장애인도, 아이도, 노인도 걸을 수 있는 카미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단지 구호로 끝내지 않고, 현실화를 위해 그들은 노력하고 있었다. 갈리시아에서는 모든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숙소)가 장애인 화장실과 휠체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방을 하나씩 갖춰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 놓았다. 실제로 우리가 머문 알베르게마다 장애인 화장실이 있었고, 알베르게 안에 턱이 없어 휠체어가 이동하기에 수월했다. 카미노가 끝난 후 나는 코로나에 걸려 스페인에 남아야 했다. 다행히 증상은 가벼웠다. 스페인은 격리 규정이 해제된 후여서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코비드 유목민이 돼 스페인을 떠돌았다.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에서는 마침 안뜰 축제(저마다 정성껏 가꾼 자기 집 안뜰을 개방하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안뜰을 공개한 집들이 표시된 지도 한 장을 들고 매일 남의 집 정원을 기웃거렸다. 지도에는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 집들이 따로 표시돼 있었다. 작은 도시 아빌라의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에도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 모든 거리가 표시돼 있었다. 비단 스페인만이 아니다. 유럽의 미술관이나 상점은 휠체어 장애인의 접근이 가능한 곳이 많았다. 공공기관은 말할 것도 없다. 미술관에서 휠체어에 앉아 그림을 감상하는 이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그 뒷모습을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아무렇지 않은 그 주변의 공기까지 부러웠다. 그들에게 시선이 멈추는 건 나에게 장애인 가족이나 벗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삶이 불가능해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 내 삶의 질을 떠올려 보면 암담해진다. 슬프게도 나에게는 믿음이 없다. 내 이웃이, 내 조국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신뢰가 없다. 나에게 가장 절실한 국가의 역할은 장애인, 성소수자, 어린이, 노인, 여성,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약자로 삶을 시작해 사회적 약자로 삶을 마감하기에. 선진국의 척도 또한 내게는 국가가 사회적 약자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해주는가, 그 사회가 약자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다.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에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호하는 나라를 꿈꾼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정당의 대표였던 이가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대해 막말 수준의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고, 언론은 아직도 “시민을 볼모로 어쩌고” 등의 헤드라인을 쏟아내는 나라이니. 선진국 진입을 자랑하는 지금에도 장애인들이 이동권 시위를 해야 할 정도로 우리는 그들에게 무관심했다. 화를 낼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30년 전 처음 유럽을 여행할 때 의문이 들었다. 아니, 선진국이라면서 길에 왜 이렇게 장애인이 많은 거지? 인구 대비 장애인 수가 특별히 많아서가 아니었다. 인구의 10%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은 외출을 하지 못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장애인을 비롯해 교통약자가 탑승할 수 있는 저상버스의 도입률은 현재 30%에 불과하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의 경우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시외·고속버스는 전체 노선의 4%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도 장애인들은 목숨을 버려 가며 싸워야 했다. 올여름, 밥벌이를 하느라 여러 번 바깥 나들이를 했다. 인천공항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올 때마다 트렁크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장애인들의 목숨 값으로 생겨난 결과물에 무임승차하며 생각했다. 비장애인이 설계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포기하는 일 없이 더 끈질지게 싸워 주면 좋겠다고. 세상은 한 번도 저절로 나아진 적은 없었다. 우리 삶의 질은 언제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소수의 사람들 덕분에 향상돼 왔다. 그들이 싸울 때 함께 선로에 드러누울 용기는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지하철이 멈췄을 때, 평생 그 지하철을 타지 못하고 살아온 누군가의 삶을 상상해보며 30분이든, 세 시간이든 기꺼이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 시위는 결국 내 미래를 위한 싸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남희 여행작가

[김남희의 길 위에서] 에어비앤비 호스트로 산다는 일

바드 아우시에 갈 계획은 없었다. 호숫가의 뾰족탑 교회 풍경으로 유명한 할슈타트에 가던 길이었다. 할슈타트는 에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배경이 됐다는 소문으로 ‘오버 투어리즘’을 앓고 있었다. 인구 8백 명의 작은 마을이 수용할 수 없는 수의 관광객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부분은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넘쳐나는 쓰레기, 빈번한 사생활 침해, 치솟는 물가 등 주민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졌다. 마을 곳곳에는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쓰레기 버리지 않기’, ‘사적인 공간 침해하지 않기’, ‘소음 주의’ 등의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머물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스러웠다. 당연히 숙박비도 비쌌다. 에어비앤비 앱에서 외곽의 숙소를 골랐다. 할슈타트에서 기차를 타고 이십 분쯤 가는 곳이 바드 아우시였다. 2천 미터 내외의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었지만 산골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에어비앤비에 올라온 알렉산드라의 집은 평이 꽤 좋았다. 에어비앤비는 공유 경제에 기반한 숙박업이다. 원래 의미는 자기 집의 남는 공간을 숙소로 내놓고 손님과 주인이 교류하는 곳이었다. 이 앱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에어비앤비의 본래 의미는 퇴색하고 변해갔다. 자기 집이 아닌 아파트를 몇 채씩 빌려 세를 놓거나 전문 업체에 관리를 맡기는 ‘임대업자’들이 늘어났다. ‘비대면 체크인’에, 모든 응답이 문자 메세지로 이루어지는 일도 흔하다. 늘 혼자 다니느라 대화가 아쉬운 나는 가끔 에어비앤비에서 숙소를 고르곤 한다. 하지만 점점 주인 얼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도 버릇을 못 끊고 사람이 그리워질 때면 에어비앤비를 뒤적인다. 알렉산드라의 집을 예약할 때도 큰 기대는 없었다. 예약 후 받은 첫 문자의 내용은 도착 시간을 알려주면 기차역으로 픽업을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기차역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13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나는 도착 시간을 알려줬다. 기차역으로 나를 데리러 온 알렉산드라는 내 또래의 여성이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그녀가 이 근처에 예쁜 호수가 있는데 둘러보고 가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가죠.” 우리는 호숫가에 차를 세워두고 호수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7월 중순의 오스트리아는 날씨가 좋았다. 시원한 바람이 산들산들 불었고, 하늘은 붓질 한 번으로 꽉 채운 캔버스처럼 푸른 빛으로 가득했다. 어디에도 마스크를 쓴 사람이 없어서 코로나 따위는 이미 사라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호숫가의 카페에서는 결혼식 피로연에 온 이들이 라이브 연주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해변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너머로는 작은 조각배 한 척이 천천히 흘러갔다. 마음이 몰랑몰랑해지는 풍경이었다. 그녀에게 손님과 자주 산책을 하냐고 물었다. “그러고 싶지만 바쁠 때가 많아 자주 못해요. 하지만 손님을 통해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해요.” 그녀는 어렸을 때 바드 아우시를 떠나 비엔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십 년 전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 에어비앤비를 시작했다. 소란스럽고 소비적인 도시에서의 삶에 지쳤다고 했다. 그녀는 녹색당의 열렬한 당원이었고 이 지역 위원장이기도 했다. 여행을 좋아하고, 낯선 문화에 호기심이 많고,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것. 둘 다 싱글이며, 에어비엔비 호스트라는 점.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서인지 이야기가 잘 통했다. 호수를 한 바퀴 걷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다시 물었다. “옆 마을에서 소방관 돕기 자선 바자를 하는데 가볼래요?”, “와이 낫.” 다시 차를 몰고 10여 분을 달렸다. 장터에는 옷과 가구와 그릇, 책 등 다양한 물건이 나와 있었다. 집집마다 무언가를 무료로 내놓고, 수익금은 전액 소방관들의 장비 마련을 위해 기부한다고 했다. 동네 청년들로 꾸려진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전통옷 던들을 차려입은 청년들이 간이 주점에서 술과 음료를 팔았다. 나는 십자수를 놓은 테이블 매트와 방석 커버를 1유로씩 주고 샀다. 알렉산드라는 손님 방에 놓을 램프와 좋아하는 작가의 책 예닐곱 권. 천막을 쳐서 만든 주점에서 맥주를 마시며 물었다. “소방관들이 왜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를 열어요? 국가가 보조를 안 해줘요?”, “이런 작은 마을은 국가 보조가 없어서 훈련도, 장비 구입도 알아서 해야 해요. 그래서 마을마다 소모품인 장갑이나 헬멧, 방호복 같은 장비 마련을 위해 바자회를 열고는 하죠.”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오스트리아마저도 소방관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은 건가 싶었다. 우리는 각자의 전리품을 손에 들고 뿌듯한 마음으로 귀가했다. 다음날은 기차와 배를 갈아타고 할슈타트로 건너갔다. 이 지역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소금광산 투어는 꽤 알차고 재미있었지만, 마을은 딱히 볼거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서 바드 아우시로 돌아가고 싶었다. 마을로 돌아와 그녀가 추천한 산책로를 걸었다. 할슈타트에서 나는 반갑지 않은 관광객일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미움받지 않는 존재인 것 같았다. 일단 외지인으로 붐비지 않으니 부담이 없었다. 바드 아우시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그녀가 왜 비엔나를 떠나 이곳에 정착했는지 알 것 같았다. 7박 8일의 짧은 오스트리아 여행 중 가장 충만했던 시간은 바드 아우시에서 보낸 이틀이었다. 그곳에 알렉산드라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롭고 고단한 여행자의 어깨를 담담히 토닥여주는 손길이 있었기에. 나도 우리집 아래층을 여성 전용 에어비앤비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집을 찾는 손님의 대부분은 이삼십대 여성들. 평소에는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그녀들은 꽤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때로는 눈물을 떨구며 속내를 드러내기도 한다. 내가 모르는 그녀들만의 세상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럴 때면 앉은 자리에서 여행을 하는 것 같다. 내가 차려주는 밥상은 어쩌면 미끼인지도 모르겠다. ‘자, 나는 당신을 위해 이렇게 공을 들였어요. 당신도 무언가 내놓아보세요.’ 그렇게 말을 하는 일은 물론 없지만, 밥은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한 공간에서 잠을 자고,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만으로 사람의 마음은 느슨해진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내내 누군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한 사람을. 낯선 여행지에서 우리 마음의 빗장은 쉽게 헐거워진다. 스쳐 지나는 사람이기에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한다. 예기치 않았던 그런 순간을 통해 어떤 해방감을 맛보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마음을 나누는 그 드물고 귀한 순간을 위해 오늘도 나는 에어비앤비의 문을 두드린다. 지금은 헝가리를 떠도는 여행자로 문을 두드리지만, 돌아가면 내 집 문을 두드리는 이를 맞이할 것이다. 그 양쪽 세계를 오가며 나는 여전히 꿈꾼다.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그 찰나의 소통을. 김남희 여행작가

오피니언 연재

지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