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종 칼럼] 우리 사회에 내재된 위험·차별·혐오

한 달 전이다. 미국 텍사스주 쇼핑몰 총기난사가 벌어지고 몇 개의 보도를 시청하자 곧장 끼쳐온 심정은 이 사건의 트라우마가 내게 전이해 오는 것을 한사코 피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관련된 보도를 더는 듣거나 보고 싶지 않았다. 며칠 뒤면 둘째 딸 가족의 미국 연수가 예정돼 약간의 공감이라도 마음에 일면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웃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온몸에 총기난사를 당한 비극적 참사였다. 순진무구한 세살배기를 포함한 한인 교포 일가족이 갑자기 숨져간 그런 끔찍함은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항용 혐오와 증오범죄는 특정 인종이나 국적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 겹쳐 일어난다. 하지만 이번 텍사스 참사는 이보다는 근본적으로 다인종 사회의 구조적 불의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즉, 국가가 마땅히 기울여야 했던 인종차별과 혐오에 대한 주의와 대응역량의 퇴화가 근원일 수 있다. 이는 흑인 대통령까지 배출할 정도로 미국 사회의 다원성이 미국의 정신적 힘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미국 사회를 언제든지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게 할 수 있고 국가적 권위를 약화시킬 수도 있는 또 다른 단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미치광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폭력적 행위나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뺏긴 백인 청년층의 박탈감이 배경인지 그 관점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는 국가 구성원들이 서로 믿음을 지니고 함께 살아야 하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왜 미국의 정치권력은 백인 우월적인 혐오를 부추기고 편파성 공권력으로만 기능하게 됐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2023년 현재 미국에는 인종 혐오 그룹 784개가 적극 활동하고 있다. 만약 노예로밖에 안 보이는 흑인, 후진적인 유색인 이민자라는 백인 우월 사상이 계속된다면 미국 사회의 미래는 이번 사건과 같은 등잔 밑 재앙의 강한 역풍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비단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유럽에서도 브렉시트 이후 혐오 범죄가 증가하고 있고 중동에서도 종파 간의 테러가 길거리를 피로 얼룩지게 하고 있다. 우리 사회 역시 온갖 이해관계로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혐오와 증오 표현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다문화 사회로의 진입으로 인한 이주민들이 느끼는 차별에 대한 불만, 편견과 일자리 경쟁으로 인한 사회 갈등은 얼마든지 폭력으로 촉발될 수 있는 사항이다. 비단 사회적 약자로서의 이주민,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에게 자유로운 역량 발휘 기회가 적은 사회 환경만이 해결해야 할 숙제가 아니다. 치열한 정치적 반목과 탐욕, 권력지향적 정치인들의 ‘내로남불’ 이중성은 더욱 위험한 국민적 분노 유발 요인이다. “모두가 용이 될 필요는 없다”며 ‘가붕개’로 살아가라고 말하는 기득권 정치인들의 경악스러운 망언 역시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를 황폐화하는 치명적 독소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우리도 소수자에 대한 배타적 분위기와 그들의 다양한 절규가 우발적인 사고를 촉발시킬 가능성은 없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평등으로의 인권 가치는 차별과 적대가 아니라 ‘상호 간의 공존과 공영’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발달한 민주주의는 갈등과 대립에 대한 긍정적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에 소수자의 신념이 극단화됨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지역분열·이념 대립과 마이너리티에 대한 차별과 무시라는 사회적 질병에 필요한 것은 상처를 아물게 할 치료이지 상처를 덧나게 할 공격은 아닌 것이다. 북한의 핵위협으로 불안해진 위기의 시대, 우리에게도 서로를 하나로 묶고 강한 나라를 만드는 게 가장 큰 과제다.

[이만종 칼럼] 어떻게 전쟁이 시작될 수 있는가...치킨게임의 함정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포연은 1년이 넘도록 그치지 않으며 덩달아 한반도의 긴장도 끝없이 고조되고 있다. 1950년대 제임스 딘의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 등장하는 2명의 청소년은 차를 몰고 낭떠러지를 향해 고속으로 질주한다. 자동차를 놓고 먼저 방향을 틀은 쪽이 패자, 그리고 끝까지 방향을 유지한 쪽이 승자가 된다. 두 마리의 수탉이 서로 마주 보고 물러서지 않는 ‘치킨게임’이다. 최근 남북 간의 상황이 그렇다. 그동안 북한의 도발은 큰 틀에서 살펴보면 일회성의 도발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군사적 대립을 벌이고 있다. 남북 간 통신연락망은 벌써 2주 넘게 두절되고 지난 2월 화성-15,17형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 발사에서 최근 신형 고체연료 엔진 ICBM 발사에 이르기까지 북한이 감행한 도발 행태는 더 과감하고 대담해지고 있다. 핵·미사일 고도화 목표 역시 그들의 계획된 수순과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특히 최근 ‘전쟁억제력의 공세적 확대’를 언급한 것은 또 다른 도발을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 입장에서 핵·미사일 실험은 고위험 고수익을 노린 이성적 도박이고 자부심일 수 있다. 앞으로도 핵·미사일 실험을 자제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북한을 저지할 방법은 무엇일까? 남북 대화를 통해 풀어보겠다는 우리 측 기대는 지난 정부에서 무참하게 실패했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전술핵 재배치와 핵 보유 주장은 미국의 핵우산 보장 공약만으로는 ‘사실상 핵 무장’ 상태인 북한을 억제하기 어렵다는 다수의 여론에 기반한다. 일반적으로 핵 억지론의 기본 전략은 ‘상호확증파괴(MAD)’다. 즉, 핵을 쓰면 서로 절멸하기 때문에 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북 압박 수위를 높이는 선택이 최선이라는 판단은 어렵다. 북한은 ‘핵을 안 쓰면 김정은 정권이 100% 쓰러지고, 핵을 쓰면 1%라도 체제 보장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 문제다. 북한은 전통적인 ‘핵 억지 이론’이 통하지 않는 체제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비핵화 목표는 1년 전의 상황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위기 국면이다. 최악의 가정이지만 정말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이 미국의 본토를 위협할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면 미국은 자위권 차원에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북한 역시 선제공격에 맞대응하게 되고 전면전은 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게 예측된 시나리오다. 만일 미국이 자국 이익을 위해 미국 우선주의의 방법을 선택하면 우리에게는 안보 재앙이다. 미국의 도·감청 의혹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지만 동맹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현실적으로 남북 간 대결을 막을 수 있는 선택지는 몇 가지 없어 보인다. 때문에 다시 격화되는 남북 간 군사적 대립과 긴장이 우리의 일상과 삶을 어떻게 바꿀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남북 간의 전력은 서로 상대방을 똑같이 완벽하게 격파할 수 있어 어느 쪽도 먼저 방향을 돌리는 수치스러운 역할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결국 각자가 상대방에게 방향을 돌리라고 고집하는 군사적 치킨 대결에서 결과는 ‘프라이드치킨’, 즉 양쪽의 공멸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로 불렸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가 버텨 온 것은 국제사회의 지원 덕도 빠뜨릴 수 없지만 애국에 기반한 단결과 용기가 가장 크다. 전쟁이라는 참상과 그 뒤에 따라오는 비극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어떻게 발생하고 그 뒤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를 직시해야 한다. 남북 간 대결이 주변국들과의 역학관계 속에 한 치 양보 없는 치킨게임의 양상으로 비화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북한의 핵무기 사용을 거부하고 막아낼 완벽한 군사적 대비도 서둘러야 하지만 북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외교적 능력과 국민적 단합이 중요하다. 정치 영역에서도 전쟁보다 치열한 대립과 갈등을 그쳐야 한다. 전쟁의 종국에 남는 것은 ‘야만성’이다.

[이만종 칼럼]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이관, 최선인가 차악인가

어떻게 하면 국가정보원이 국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조직이 될 수 있을까? 최근 내가 생각해본 물음이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경찰 이관이 1년도 남지 않은 지금, 이 문제를 놓고 찬반 논란이 다시 불붙고 있기 때문이다. 또 현재 국정원의 약화된 정보 역량이 안보 공백을 가져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와 불안도 야기되고 있다. 지난 정부 5년 동안 무수한 국정원의 개혁과 변화에 대한 의견들이 제기됐다. 일군의 학자들은 국정원의 권한을 통제하면 국민의 인권침해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를 묶어 놓지 않고 생선가게를 맡길 수는 없다’는 영국의 정치학자 하이에크의 주장과 같은 관점이다. 이는 무제한적 권력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대표적 논점이기도 했다. 사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금과옥조처럼 지켜야 할 정치적 중립을 파기하고, 본연의 직무를 벗어나 일탈한 과거 사례는 그동안 국정원이 국가안보의 한 축을 담당해온 공로에도 불구하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대공수사권 이관 문제는 두 가지 이유에서 후과를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국가 안보상의 위해나 국익 침해 사항이 발생할 경우 선제적으로 대비하고 통제할 현실적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정보와 수사의 분리가 대세라는 주장은 일면 그럴듯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지금도 미국의 연방수사국(FBI)은 수사기관이지만 정보기관으로서 국내 수사와 보안 정보를 함께 담당한다. 특히 9·11테러 이후 미국은 해외 정보와 적극적 방첩활동을 국가 정보의 두 축으로 설정해 국가적 위기나 재앙에 선제적으로 대비하는 예방적 정보활동 체계를 구축했다. 프랑스의 국토감시국(DST)을 비롯해 다른 20여개 국가도 정보와 수사를 겸한 통합형 국가정보기구를 운영한다. 지금 세계가 그렇다. 둘째, 더 중요한 사실은 경찰이 하는 범죄 수사와 정보기관이 하는 안보 수사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범죄 수사가 사후 조치 중심이며 현장체포에 중점을 둬 기소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안보 수사는 전향적이고 위협 중심적이며 예방적 기능에 주력하는 게 특징이다. 기능 개편과 개혁 성공의 핵심은 권한을 어떻게 통제하고 효율적으로 극대화될 수 있도록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가진 권력이 힘이 아니라 가진 정보가 힘이 돼야 한다. 고(故)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거론한 ‘한국 내 북한 고정간첩 5만명’ 주장이 사실이라 단언하긴 어렵지만 2023년 벽두를 장식한 일부 진보단체들의 이적행위 의혹은 대공수사권을 결코 한가롭게 다뤄서는 안 됨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더욱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안보는 생존’과 직결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북한의 노골적인 위협을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안보 여건에서 우리가 스스로 무장해제하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 물론 국정원의 안보수사권 유지가 권력 부패와 정치적 일탈로 악용된 잘못된 과거를 답습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가 극우 혹은 극좌 포퓰리즘 득세로 양분되고 있는 것은 걱정이다. 사실과 거짓,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개인의 ‘상식력’이 후퇴하는 조짐이 요즘 우리의 모습이다. 국정원의 수사권 분리 역시 국민의 신뢰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장기적 개혁과제이긴 하지만 현재의 열악한 방첩 인프라와 미비한 안보 수사의 법제를 고려할 때 시기상조라는 제언을 하고자 한다. 과정에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투명한 절차를 유지하고 정치적 간섭은 피해야 한다. 다툼 없고, 전쟁 없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 것은 모두의 소망이다.

[이만종 칼럼] 걱정되는 다섯 가지 안보 위험

해가 바뀌고 봄이 다가오지만 나라 안팎으로 안보환경은 녹록지 않은 형국이다. 국외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고 국내에서는 북한 무인기 침투, 간첩단 수사가 벌어졌다. 나는 비록 유려한 탁견은 아니지만 이 땅에 사는 많은 보통 사람 중 한 명으로 최근 안보 상황에 대해 몇 가지 걱정을 떨치기 어렵다. 첫째, 정치인들의 정쟁이 국가안보를 망칠 수 있다는 걱정이다. 생각해 보자. 요즘 입 달린 사람 치고 정치판 싸움에 욕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적(敵)은 나라 밖에 있는데 나라 안에서 먼저 분열돼 국력을 낭비하고 있다. 지붕에 빗물이 새고 있지만 누구 그릇에 밥이 더 많이 담겼는지를 놓고 형제가 싸우는 격이다. 한반도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이성적 인식 없이 내지르는 포퓰리즘적 정치 수사들은 나라를 위기로 내몰 수 있다. 노림수가 뻔한 정쟁은 이제 그쳐야 한다. 둘째, 좌우 이념의 상충적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의 합리적 민주주의 사상을 편향적 갈등으로 추동시키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사상적 기저에 깔린 경직성과 편협성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된 여러 간첩단 의혹 사건은 우리 사회의 사상적 훼손의 징표다. 북한공작원들이 국내 곳곳에서 암약해 왔다면 충격이다. 셋째, 약화된 안보역량과 불감증이다. 최정예 우리 군이 장난감 같은 무인기에 조롱당하는 불명예를 어쩌다 안게 됐는지 아쉽다. 전쟁 위기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불가해한 무감각과 무관심, 그리고 그러한 집단적 병리 현상의 근원에 똬리를 틀고 있는 무력감은 더 큰 문제다. 곧 전쟁이 터진다 해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초연할 수 있는 한국인들의 ‘안보 불감증’에 외국인들은 분단 현상보다 더 놀라워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 넷째, 무력해진 국가안보 법제와 방첩 시스템이다. 오늘날 안보의 근간은 정보전쟁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익을 뒷받침해야 하는 국정원의 대공수사권 이관 재검토, 핵심 사항이 빠진 ‘테러방지법’ 개정과 최근 주요 이슈인 ‘사이버안보기본법’ 제정도 시급하지만 정치적 논쟁과 해석이라는 난제에 맞닥뜨리고 있다. 국가안보 수호라는 관점에서 숙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강력 확보다. 북이 핵무장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점은 세상 누구도 다 안다. 북한의 전쟁 시나리오는 짧고 치열한 단기 속결전이다. 미국과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 한국에 대한 지원을 억제한 뒤 신속히 남한 전역을 장악하려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의 계산대로 동맹과의 연합작전은 쉽지 않을 수 있다. 9·11테러처럼 미국 본토가 치명적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의 한반도 전개는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확장억제 수단도 유용하지만 미국의 지원은 북한으로부터 공격받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스스로 지킬 결기와 역량이 없으면 결정적 굴욕을 경험하거나 국가의 생존에 대한 치명적 위험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공격보다 방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이제는 철 지난 이론일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믿음 역시 엄청난 위험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남북 간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언적 명령이다. 남북 간의 열전은 모든 사람과 사물은 말할 것도 없이 서로 다투는 당사자 모두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국가안보는 달성이 아닌 추구다. 우리가 추구할 최우선 가치는 일상의 평화와 국익이다. 국민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지도력과 초당적 대북 정책을 추진하는 각고의 노력을 부탁하고 싶다.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의 긴장이 해소되고 더 넓은 평화의 진전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이만종 칼럼] 사이버안보법 제정, 성숙한 논의 필요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버 전쟁은 박진감 넘치면서도 손쉽게 진행된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몇 번 클릭하고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해킹에 성공하고 바이러스를 심어 놓는다. 이 같은 위험은 단순히 영화적 허구에 머무르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 국가 안보와 경제의 무수한 핵심 분야도 현재 이 같은 위험에 처해 있다. 북한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사이버 공간에서 금융 공격과 해킹을 주요 외화 수익원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9월 미국 하버드대 벨퍼센터가 발표한 ‘국가 사이버 역량 지표 2022’에 따르면 북한의 암호화폐 해킹 공격 역량은 세계 1위다. 더구나 정찰총국이 관리하는 ‘라자루스’ 등 정예 조직에서 활동하는 300~500명이 지난 2년여 동안 해킹으로 탈취한 돈과 암호화폐의 규모는 10억달러(약 1조3천160억원)가 넘고, 이는 북한 미사일 프로그램 자금의 약 30%에 해당한다는 게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최근 분석이다. 현재 북한의 전체 해커 규모는 6천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해 11월 제정안이 입법 예고된 ‘국가 사이버 안보 기본법’은 필요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벌써 정보의 주도권, 사생활 침해 문제 등 세부적 사항에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자칫 과거와 같은 공안정국의 매카시즘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공권력 불신에 대한 일각의 우려와 비판도 강하다. 물론 사이버안보법의 존재가 사이버 공격을 방지하는 실재적인 효율과 가치를 얼마나 갖고 있는가 하는 입법의 타당성 문제는 논의될 사안이다. 이 법 제정이 사이버 공격에 대한 모든 행위를 차단하는 완벽한 안전장치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록 ‘법’이 존재해도 모든 불법을 무조건 막아내기 어렵다는 이치다.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과 존엄성을 보장하는 법에 대한 ‘용인성(容認性)’ 측면도 살펴야 한다. 이는 2013년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 개인정보 수집 실태를 폭로한 전 중앙정보국(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의 인권과 사생활 침해가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억지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이번 사이버안보법 제정 문제는 정치적인 논쟁과 해석보다는 국가 안보 수호라는 측면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논의에 임했으면 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사이버 안보 상황은 세계에서 가장 위중하지만 관련 법제 구축은 허술하다. 더구나 통상 국가안보 법제는 안보와 인권 간의 관계에서 상호가치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지만 국가 사이버 대응 능력 강화는 근본적으로 사이버 공간에서의 안전보장 능력과 국가 법 집행 능력의 확보라는 주요 목표를 전제로 추진돼야지 결코 찬반 양측 간 극한 대치를 벌일 일은 절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과거 테러방지법처럼 법안 통과라는 조급함으로 내용의 충실성보다는 핵심 사항이 빠진 형태만 남는 법안이 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견제와 균형보다는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이견을 보이는 사안이 여럿 있다. 사이버안보법 제정을 놓고도 아무 일도 못하는 싸움판 논쟁의 새로운 주제로 시작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이 얼마나 타당하고 적절하게 행사될 수 있는가 하는 측면과 함께 전체적, 통시적 관점에서 사회규범적인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 국민의 사생활 침해와 공권력 남용에 대한 우려도 향후 운영 과정에서 명확한 법률적 권한 규정 명시 등 제도적 안전장치와 높아지는 국민의 정치 성숙도가 어느 정도 차단할 것이라 믿고 싶다.

[이만종 칼럼] 공론을 이끌어내는 정치

36.4%,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한 달 만에 30%대 중반에 진입했다. 그동안 답보 상태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큰 변화다. 국가 운영에 관한 한 여론은 중요하다. 특히 국난 극복에 국가의 역량을 결집시켜야 하는 경우 더욱 그렇지만, 임기 초반 국민의 기대감이 높아 지지율이 높게 형성된다는 공식이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사실 여론은 목소리가 큰 사람, 시끄러운 소수의 이념적 논리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실체 파악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침묵하는 다수’로 인해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생각이 사회적으로 다수라고 느껴지면 마음껏 의견을 표출하지만 소수라고 생각되면 그냥 침묵한다는 ‘침묵의 나선 이론’에서도 확인된다. 더구나 정치적 접전 속에 과열된 설전은 불신을 쌓고, 사실과 무관해도 부정적 프레이밍이 설정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상대 흠집 내기까지 여론으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실제 유권자들의 입장이 급격하게 변하기는 힘들다는 점에서 더러 선동적이더라도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정치에서 갈등은 필연이지만, 새 정부의 정치적 실천은 곳곳에서 차단된다. 정부입법 발의 법안 77건 중 처리는 0건이다. 노조의 투쟁도 강경하다. 국가지도자의 성패가 곧 나라의 사활이어서 지나친 반대는 걱정이다. 상호 심각한 감정이입의 부재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가 개탄스럽고, 유권자들의 변심이 야속하더라도 여론의 반전은 지도자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금 국민들은 힘들다. ‘지키는 자’와 ‘반기를 드는 자’로 나뉘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는 세상에서 결론 없는 논쟁, 생채기 내는 정치는 먹고사는 데 의미가 없다. 더 큰 근심은 앞으로도 고착화된 이분법적 거친 정쟁이 쉽게 그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내전과 같다고 할 정도의 치열한 충돌이 깊어지는 과정에서 튼튼한 나라가 만들어지기보다는 국가 안보와 경제가 분절(分節)되고 손상된다. 최근 북한은 ‘핵 무력정책 법제화’를 선언하고, 미사일 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핵 참화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대두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정치권은 무심한 평온이다. 유사시 정치인들은 어떻게 나라를 지킬까 한숨만 난다. 링컨은 “대중의 감정을 좌우하는 사람은 더 심원(深遠)한 차원의 정치를 펼 수 있다”고 했다. 국가가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민심의 변화를 살피고 헤아려야 한다. 앞으로도 지지율은 등락을 거듭할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의 철학이 입증되고 유권자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한다면 지지율의 급반등은 쉽지 않다. 정치지도자의 비전과 정책이 더욱 혁신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새 정부의 정치는 지난 정부의 아쉬움처럼 ‘상호 적대적 규정’으로 좁아져서는 안 된다. 중도층까지 포용하고 통합하는 ‘지도력’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여론의 힘이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세상사는 달라져 왔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다. 여론 형성의 주체는 국민의 공론(公論)이다. 대중은 위대한 지도자, 완벽하고 신에 가까운 능력의 지도자를 꿈꾸는 한편 동시에 매우 서민적이고 친구 같은 정치지도자를 원한다. 국민의 가슴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이만종 한국테러학회장·호원대 법경찰학과 교수

[이만종칼럼] 쉽게 말하는 전쟁의 수사, 적절한가

잇단 북한의 도발로 안보 상황이 예단하기 힘들다. 핵무기 억제를 위한 군사적 옵션에 대한 언급도 점차 고조되고 있다. 북한이 핵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전에 전쟁 대응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국 전술핵 재배치와 핵 공유 구상을 거론하게 하고 선제타격(Kill Chain) 같은 군사적 행동 가능성을 부추기고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만일 지금 선제타격을 고려하는 경우 과연 ‘정밀타격’으로 북한의 핵시설을 무력화할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북한은 게임도 안 되고, 쉽게 없애버릴 수 있는 그런 상대일까. 전면전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타격할 수는 있겠지만 성공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북한의 핵 개발 능력과 의지를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지는 장담하기 힘들다. 제한적 범위의 타격이라도 전면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많다.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 때도 영변의 핵시설을 폭격했다면 북한의 핵 개발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에도 전면전에서 발생할 사상자 수를 감안해 계획은 무산됐다. 이처럼 군사적 옵션은 쉽게 말할 수 있어도, 생각만큼 깔끔하고 단순한 옵션이 아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지켜만 볼 수도, 전면전을 각오하고 선제타격의 방법을 선택하기도 어렵다. 칠 건가 말 건가를 결정 못 하는 전략적 딜레마다. 군사적 작전으로는 유효성이 주저된다. 다음은 참수(斬首) 작전을 보자. 적의 전쟁지도부가 마비되면 적을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효한 전술이다. 오사마 빈라덴과 사담 후세인 제거는 대표적 성공 사례다. 미군의 참수 작전은 현재 ‘고가치 표적(High Value Target)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정규 작전이 됐다. 그러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전쟁은 깊어지게 된다. 전쟁 상황을 가정해 보자. 북한은 상당한 재래식 전력과 화학·생물학무기,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재래식 전력인 장사정포는 핵무기나 미사일 같은 정밀유도무기보다도 오히려 우리를 가장 괴롭힐 수 있다. 사거리가 30~60km에 달하는 이들 무기를 경기 북부권과 서울 중심부를 타격하는 데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결국은 전면전에서 북한의 군대와 무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느 때 작전을 전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과 미국 모두에 판단이 어렵다. 트럼프 행정부도 북한에 대한 “전략적 인내는 실패했다”고 선언했지만 정작 군사적 선택은 고민만 했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얻게 되는 것이 안정일지, 극도의 혼란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남과 북 모두의 생명과 평화는 처참하게 변한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것은 분명한 우리의 소망이지만, 평화를 지키는 기본적 전제는 어떠한 계산된 광기도 궤멸(潰滅)할 수 있는 억지력의 보유다. 우리는 과연 전쟁을 감당할 준비가 충분히 돼 있는지, 아니면 무엇을 해도 어차피 전쟁은 안 난다는 안일한 생각에 젖어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만에 하나 어림짐작으로 전쟁을 그리며 군사적 옵션을 이야기하고, 북한 정부의 붕괴를 바라고만 있다면 그것은 현실을 너무 모르는 책임 없는 자세다. 지금 우리 안보 상황은 엄중하다. 핵 참화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커지고 있다. 이제 정치권의 분별없는 정쟁도 그치고, 튼튼한 나라 만들기에 힘을 모아야 한다. 이만종 한국테러학회장·호원대 법경찰학과 교수

[이만종칼럼] 테러, 경각심 없다… 가능성은 위험한 미래 전조

21년 전인 2001년 9월11일 미국 워싱턴과 뉴욕에서 3천여명이 희생되는 최악의 국가 재난이 발생했다. 올해도 뉴욕의 맨해튼 현장은 큰 추모 행사가 개최됐다. 9·11 테러는 21세기 세계사의 출발을 결정짓는 전철기(轉轍機) 역할을 했다. 대낮에 미국 경제력의 상징인 110층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붕괴되고 군사력의 핵심인 국방부 건물이 피폭되는 동안 국가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어떤 기관도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 ‘슈퍼파워’ 미국의 자존심은 테러리스트 몇 명에 의해 송두리째 무너졌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지금까지도 각종 음모론에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9·11 테러의 근본적 동기에는 관심이 없다. ‘로렌스 라이트’가 쓴 ‘문명전쟁’부터 9·11의 진실을 추적한 수많은 연구들에서조차 “알카에다가 사악한 테러를 저질렀다”고 비난했지만 정작 미국의 책임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영국 언론 ‘매닝엄불러’는 미국의 중동 외교 정책에 대한 반감이 이슬람 극단주의라는 요인 못지않게 중요한 9·11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편파적인 친이스라엘 정책과 팔레스타인 문제가 반미·반서방 정서를 만들고 테러리즘에 동력을 공급하는 진원지라는 주장이다. 중동에 대한 미국의 편견을 다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분명 테러리스트들은 인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져다준 살인자들이다. 그러나 중동에 대한 서방의 편견과 오만이 결국 아랍인들의 저항을 유발했고 젊은 무슬림들을 단합시키는 계기가 되어 테러로 몰아가는 불씨가 됐다는 지적은 한 번쯤 생각해볼 사항이다. 유럽 테러의 원인에 대해서도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이민 2~3세 젊은이들의 ‘허무주의’에 있다고 말했다. 소외되고 방황하는 허무주의자는 폭력적 자극에 취약하고 이들에게 투사가 되길 부추기는 것은 그들이 극단화될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의미다. 우리가 지금처럼 테러를 이슬람 급진화의 방향에서만 생각하는 것은 이슬람에 대한 공포감을 증가시키고 무슬림들을 모두 잠재적인 테러범으로 취급하게 될 뿐이다. 이로 인한 이슬람 혐오증과 극우 지지는 반(反)이슬람의 감정을 더욱 부추기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는 진짜 뿌리는 남겨둔 채 테러리스트를 잡겠다는 것처럼 소용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난 8월 미국에서 발생한 작가 살만 루슈디의 피습 이유도 ‘이슬람의 급진화’보다는 ‘범죄의 이슬람화’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타당한 주장일 수 있다. 한국은 테러의 청정지대일까? 실제 테러가 발생하는 것보다는 가능성만 있다는 이유로 경각심이 너무 적다. 하지만 가능성은 항상 미래 위험의 전조(前兆)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더 이상 힘 있는 자의 정의에 의해서만 평가돼서는 안 된다. 강한 자의 근거 없는 확신과 교만이 패권을 부르고, 약한 자의 멸시로 이어지면, 이는 테러로 분출될 수 있다. 정치적 영역 역시 더욱 공고해진 균열을 치유하지 못하면 치를 수밖에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사회적 통합은 현실 정치의 기반이다. 보수와 진보, 세대와 지역 간 불신과 갈등이 해소되고 약자와 소외된 세력을 염두에 둔 공정한 국가 운용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국가 이익은 국민의 안전이며, 이는 서로 다른 가치를 존중하는 공존과 공영으로 달성돼야 한다. 9·11테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이다. 이만종 한국테러학회장·호원대 법경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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